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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월 신간 도서 소개(종합) - 매주 업데이트 됩니다.
등록일
2024-02-08
조회수
217

천로역정


존 버니언 , 릴랜드 라이큰 저 / 오현미 역 / 27,000원 / CUP(씨유피)


시대를 초월한 모든 사람을 위한 진정한 걸작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힌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존 버니언의 《천로역정》 정본에
캐리 마스의 풍요롭고 정련된 해설!

영문학 교수이며 문학 전문가인 릴랜드 라이큰의
《천로역정 가이드》 수록

“이 책을 적어도 백 번은 읽은 것 같다. 읽어도 읽어도 지루하지 않을 것 같은 책이다.”
- 찰스 스펄전

“오십 년이 넘는 동안 적어도 일 년에 한 번씩 읽었다. 모든 고전 중에서도 뛰어난 고전이다.”
- 제임스 패커

시대를 넘어 널리 읽히는 고전!
이 책의 역사적 풍부함, 설득력 있는 상징, 상상력 가득한 놀라운 이야기는 시간의 시험을 넘어서서 모든 세대에게 즐겁게 읽혀지고 있다.

모든 세대를 위한 우화
“사는 게 힘들어질 때 어떻게 그 삶을 헤쳐 나가는가?” 존 버니언도 삼백여 년 전 똑같은 질문을 했다. 그 분투와 발견을 바탕으로 쓴 책이 《천로역정》이다.

《천로역정》은 그리스도인의 영적 여행기이며, 친절한 신앙 가이드다.

《천로역정》에는 크리스천이란 순례자가 등장하는데, 그는 천상의 도시로 가는 길에서 갖가지 덫과 유혹, 온갖 부류의 동행, 무자비한 원수를 만난다.
주인공 크리스천과 함께 함정과 성(城)이 나오고 시장과 골짜기가 등장하는 흥미진진한 모험에 함께해 보라. 그와 함께 가다 보면, 그 길이 매우 좁고 험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도착할 그 길 끝의 목적지는 모든 힘든 여정을 끝까지 이어갈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책 속의 책〉
릴랜드 라이큰의 《천로역정 가이드》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천로역정》 본문의 섬세한 해설과 더불어 전체를 볼 수 있는 《천로역정 가이드》가 있다는 것이다.
문학 전문가인 릴랜드 라이큰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고전 문학인 《천로역정》으로 독자들을 친절하게 안내하면서 신앙의 본질, 유혹의 현실성, 구원의 영광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
저자와 작품에 대한 소개, 작품의 문화적 정황, 문학적 특색과 더불어 《천로역정》 본문 각 장의 줄거리, 해설, 토론 주제가 제시되어 있어 함께 나누기에도 유익하다.


이번에 출간된 《천로역정》은 오현미 번역가의 유려한 번역이 원작의 느낌을 풍성히 살려주어 존 버니언의 무궁무진한 상상력을 생동감 있게 맛볼 수 있다.
이야기의 전후 배경을 알 수 있는 캐리 마스의 섬세한 해설과 내용을 담은 아름다운 일러스트가 있어 책을 더욱 풍성하게 한다.
류호준 교수의 말처럼, “독자들은 천로역정이 제2의 성경이라 할 정도로 성경을 전거(典據, 말이나 문장의 근거가 되는 문헌상의 출처)로 삼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놀랄 것이다. 특별히 《천로역정》에는 구원의 과정이 기막히게 형상화되어 있다. 말씀을 통해 찾아오신 하나님을 만나 그의 부르심에 이끌려 순례의 여정을 떠나게 된 장면은 죄인인 크리스천이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죄인을 선택하셨다는 구원의 본질을 가리키는 인상적 시작이다. ... 《천로역정》은 이 세상에서 도망치듯 떠나라는 가르침이 아니다. 이 세상 속에 살면서 죄악 된 이 세상과 치열하게 투쟁하며 살아간다는 의미의 영적 투쟁 여행기이다.
한마디로 버니언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이 지상에서 출발하여 온갖 위협과 유혹의 좁은 문들을 통과하면서 천성에 이르는 기나긴 영적 순례의 여정에 비유한다. 버니언에게 “여정”은 구원을 점진적으로 이루어가는 성화의 과정을 뜻한다. 그에겐 칭의와 성화의 과정은 분리되지 않는다. 그는 칭의와 성화를 통합적으로 이해한다. 이것이 영적 순례의 과정이 영적 투쟁의 여정이라는 뜻이다.”

존 버니언이 감옥에 있을 때 집필하기 시작하여 1678년에 출간된 《천로역정》은 출간되자마자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 후 수 세기에 걸쳐 이 책은 아메리카와 잉글랜드에서 그리스도인의 필독서가 되었고, 지금도 기독교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작품으로 여겨진다. 성경을 별개로 하면 이 책은 지금 다른 어떤 책보다도 많이 팔렸고 다른 어떤 책에 비할 수 없을 만큼 여러 언어로(이백여 개 언어) 번역되었다. 초기 개신교 선교사들은 관례처럼 선교지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고 나면 바로 뒤이어 《천로역정》을 번역하여 사역에 광범위하게 사용하였다.

◈ 책의 구성 ◈

〈이 책을 읽는 분들께〉
본서는 두 권의 책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존 버니언의 《천로역정》과 릴랜드 라이큰의 《천로역정 가이드》입니다.

《천로역정》에 담긴 캐리 마스의 해설은 이 책의 백미입니다. 글을 쓸 때의 존 버니언의 상황과 비유나 용어의 상징적 의미 등을 풍요롭게 설명해 주어, 마치 존 버니언과 대화하는 느낌으로 《천로역정》을 읽게 합니다.

릴랜드 라이큰은 미국 휘튼대학교의 영문학 교수로서, 기독교적 관점에서 고전 문학의 연구에 많은 기여를 했습니다. 《천로역정 가이드》는 이야기를 읽는 방법, 작가의 신앙, 문학적 특색, 버니언이 그리는 풍유적 인물을 비롯해 각 장의 줄거리와 해설 등 《천로역정》의 거의 모든 것을 담아 《천로역정》을 풍성히 누리게 하는 최고의 가이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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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사

이동원 | 지구촌교회 원로목사, 지구촌 목회리더십 대표
이번에 좋은 양서를 소개하는 CUP에서 펴내는 《천로역정》에는 친절한 해설이 첨부되고 있어 《천로역정》의 깊은 의미를 이해하는 데 더욱 많은 유익함이 있습니다.

류호준 | 백석대학교 신학대학원 은퇴 교수, 다니엘의 샘 원장
그동안 한글로 여러 번역본이 나왔지만, 이번 번역본은 유별난 강점이 있습니다. 탁월한 번역가 오현미 선생의 번역 문체는 매끄럽고 가독성이 아주 좋습니다. 더욱이 천로역정 의미 단락마다 그 글을 쓰는 당시의 존 버니언의 상황과 단락 내용에 대한 캐리 마스의 유익한 해설이 들어 있습니다. 보너스로, 영문학자 릴랜드 라이큰의 《천로역정 가이드》를 부분적으로 추가하여 천로역정 이해의 깊이를 더했습니다. 개인의 경건 함양을 위해, 교회의 영적 독서 모임에 한 권을 추천한다면 이 책이어야 합니다.

김영한 | 품는교회 담임목사, Next세대 Ministry 대표
천로역정을 여러 번 읽었지만, 그 상징적 의미를 다 몰랐습니다. 그런데 이 책은 존 버니언이 말한 동굴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명확히 첨삭 지도를 해 주고 있습니다. 곳곳에 시대적 상황, 묵시적 상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파헤쳐 주고 있습니다. 마치 과외를 받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김건주 | 한빛교회 담임목사, 출판기획자
《천로역정》은 성경적 진리를 총체적으로 담고 있습니다. 한 권의 책으로 신앙 전반에 관해 깊이 생각하고 읽는 이의 삶에 적용하게 하는 특별한 힘을 《천로역정》은 가지고 있습니다. 《천로역정》은 ‘판타지’라는 형식에 기독교 진리를 담고 있어서 전달하는 내용을 입체적으로 생각하고 적용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조영민 | 나눔교회 담임목사
이 《천로역정》은 현대의 독자들에게 원작을 더 정확하게 이해하고 구체적으로 적용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새로운’ 책입니다. 이 책은 《천로역정》을 처음 읽는 독자나 이미 읽었던 독자 둘 다를 향해 동일한 소망의 메시지가 될 것을 확신합니다. 이 책을 읽으며, 독자들이 그리스도의 사랑과 구원의 길을 더욱 깊이 이해하고, 그 길을 함께 걸어 가는 은혜를 누리기를 소망합니다.

고상섭 | 그 사랑교회 담임목사
존 버니언의 《천로역정》 본문만을 볼 때는 알 수 없었던 내용을 이 책은 친절한 해설로 자세히 설명해 줍니다. 왜 허영 시장을 통과하는 것이 우상숭배가 될 수 있는지, 천상의 도시로 가려면 문화 내러티브의 한가운데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현대에도 적용할 수 있는 다리를 놓아줍니다.

유경상 | CTC 기독교세계관교육센터 대표
《천로역정》은 죄 많은 세상에서 아름다운 천국으로 나아가는 그리스도인을 위한 인생 안내서입니다. 《천로역정》은 사회적 혼란과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길을 잃고 헤매는 광야의 삶을 살았던 그 당시 사람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고, 독자들을 순례의 여행으로 초대했습니다. 이 책은 영적인 혼란과 무기력에 빠져 있는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그리고 진리에 무관심하거나 진리를 갈구하는 현대인들에게도 인생의 통찰력을 제공하는 인생 안내서가 될 것입니다.












개벽사상과 종교공부


백낙청 , 김용옥 , 김용휘 , 박맹수 , 방길튼 , 이은선 , 이정배 , 정지창 , 허석  저 / 26,000원 / 창비


개벽을 일으키는 K사상 공부
동학에서 천도교, 원불교, 한국적 기독교까지
현 시대의 위기를 개벽사상으로 꿰뚫다

지금 인류사상 물질문명이 가장 화려하게 발전하고 있음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 뿌리에는 서양의 정신문명이 있는데, 도덕적·윤리적 토대가 된 그것이 과연 오늘날에도 유효하며 자본주의가 팽배한 이 시대를 얼마나 잘 감당해내고 있는가는 달리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 그렇다면 어떤 전환이 필요할까. 『개벽사상과 종교공부』는 한국 근현대 사상의 출발점이 된 동학부터 이를 계승한 천도교와 원불교,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서양에서 들어와 한반도에서 창출된 K사상의 확장에 큰 영향을 미친 기독교 사상 등을 두루 섭렵한다. 백낙청, 김용옥 등 이 시대의 스승이자 종교 전문가 9인이 우리 지성사에서 보기 드문 고품격의 토론을 펼치며 오늘의 위기를 돌파할 적실한 방법으로 개벽사상의 연마를 제안한다.

이 책은 한반도에서 시작된 사건이자 고유한 사상적 자원으로서 개벽사상이 무엇인지 이론적·실천적 차원에서 조망한다. 나아가 수운 최제우, 해월 최시형, 증산 강일순, 소태산 박중빈 등 사람의 마음을 일으키고 세상의 대변혁을 기도했던 개벽 사상가들의 사유가 녹아 있는 생생한 문헌자료와 풍부한 도판, 저자들의 토론을 토대로 개벽사상의 계보와 그 변혁운동의 역사를 탐색하고자 했다. K사상의 역량을 확인하고 세계화의 가능성도 새롭게 조명했다. 자본주의 체제의 말기국면을 살고 있으나 변혁의 희망을 잃지 않는 이들에게, 서구 중심의 고답적 사유를 뛰어넘어 문명전환의 새 시대로 나아갈 참신한 영감을 불어넣을 책이다.


다시 동학(東學)으로 돌아가야 할 이유
K사상의 출발점을 찾아서
극한으로 치닫는 자본주의가 초래한 기후재난과 생태위기 앞에서 이를 초래한 서구 사유의 한계를 성찰하는 목소리는 날로 높아지고 있다. 따라서 지금까지 우리가 흡수해온 서구의 철학적 사유와는 완연히 구별되는 사상적 돌파가 절실한 시점이다. ‘1장 다시 동학을 찾아 오늘의 길을 묻다: K사상의 출발’에서는 동학의 현재적 의의는 물론이고 동서고금의 사상사와 역사를 가로지르는 폭넓은 논의를 담았다. 수운 최제우가 서학과 대결하기 위해 제시한 동학의 골간에서 출발해 한국 사상사에 깃든 민본 개념과 민주주의의 관계, 근대의 위력과 폭력성을 꼼꼼하게 짚는다. 나아가 원불교 등 개벽사상의 계보에 놓여 있는 종교의 과거와 현재, 동학과 촛불혁명의 상관성 등을 지금·여기의 관점에서 실천적으로 탐구한다. 백낙청과 도올 김용옥, 원불교 박맹수 교무까지 세 원로 지성인이 서로의 사상적 불화와 의견의 차이를 존중하며 펼치는 대화에서 개벽종교를 향한 혼신의 탐구정신을 느낄 수 있다. 여기에 붙은 부제에서 엿볼 수 있듯이, K사상의 출발점에 동학을 놓을 수 있다는 백낙청의 주장은 특별한 주목을 요한다. 한반도가 세계에 내놓을 고유 사상의 기원을 훨씬 오래전으로 잡을 수 있겠다는 반론도 가능하겠으나, 유학 전통과 우리 토착 사상을 기반으로 유·불·도 회통의 노력을 병행한 결과가 바로 동학임을 강조한 것이다. 무엇보다 동학이 뒤에 이어질 거대한 사회운동의 씨앗이 되었다는 점은 고답적인 서구 사유의 한계를 단숨에 뛰어넘을 수 있는 잠재역량이 거기 있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개벽을 추진한다는 것
거대한 변혁운동의 시작
‘2장 동학의 확장, 개벽의 운동’에서는 동학의 사상이 어떻게 규정되었고 실제로 추진되었는지 구체적으로 살핀다. 여기서 말하는 ‘개벽’이란 태초의 천지개벽은 아니다. 민중이 자기 사유의 주체가 되는 정신의 근본적 변화와 더불어, 구체제가 종식되고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대전환으로서 개벽이다. 이를 ‘후천개벽’이라 이르고 전개한 것은 유독 한반도에서 시작된 현상이요 사건이었다. 이에 동학 연구자인 정지창, 김용휘가 한반도 후천개벽운동이 이룩해온 실천의 역사를 되짚는다. 후천개벽운동과 한국 근현대 사상의 출발점을 이룬 수운 최제우의 구상이 민중성을 중심에 둔 해월 최시형, 보국안민의 방법론을 고민하고 천도교를 연 의암 손병희, 동학혁명이 무위로 돌아간 후 도탄에 빠진 이들을 위로하고자 해원상생(解寃相生)을 펼쳤던 증산 강일순 등에게 어떻게 조금씩 다르게 계승되었는지 살핌으로써, 한반도에 고유한 사상운동이자 독특한 변혁운동으로서 개벽사상의 위상을 확인한다. 특히 1920년대에 전개된 천도교의 문화운동에 대한 각별한 관점이 돋보인다. ‘어린이날’을 제정하고 여성인권운동을 펼치는 등 잡지 『개벽』을 중심으로 새로운 사회적 활기를 불어넣었던 천도교의 문화운동을 학계에서는 문명개화운동이나 실력양성운동 정도로 간주하는 시각이 우세한데, 사실은 여성, 노인, 어린이 운동 등 모든 분야에서 전개된 문명전환 운동으로서 인간과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한 ‘개벽운동’이었다는 새로운 평가도 제시한다.

개벽종교 원불교,
자본주의 시대의 절실한 마음공부
‘3장 원불교, 자본주의 시대의 절실하고 원만한 공부법’에서는 현재 원불교의 교무로 봉직 중인 방길튼, 허석이 한국의 4대 종교이지만 여전히 일반 대중에게는 낯선 원불교의 역사와 기본교리를 친절하고 상세하게 소개한다. 이를 되짚다보면 수운 최제우, 증산 강일순, 소태산 박중빈 등 ‘개벽사상가’들은 각자 뚜렷한 특징과 성향으로 대별되는 사상가들이지만 크게 보아 한반도의 후천개벽사상이라는 거대한 흐름을 이루었고, 그 전통이 원불교의 교조인 소태산에 이르러 한층 보편화된 K사상에 도달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이 바탕에는 후천개벽이라는 한반도 특유의 사상과 불교라는 세계종교의 강렬한 융합이 소태산에 의해 이룩됨으로써 세계사의 중대한 변혁을 가져올 새로운 노선이 마련됐다는 인식이 자리한다. 세계의 보편윤리로 승격될 가능성이 있는 원불교의 주요 교리, 특히 사은(四恩) 사상에 대한 백낙청의 상세하고 흥미로운 소개와 강조가 펼쳐지는 한편, 타인의 권리를 빼앗는 ‘고혈마(膏血魔)’가 되지 말자는 소태산의 설법 해설은 오늘날 약탈적 금융자본주의를 향한 의미심장한 경계로 들린다. 물질문명이 발달하는 시대에 마땅히 이를 이해하기 위한 공부를 해야 함을 강조하면서도 우리가 다같이 잘 살 수 있는 정의와 경우에 맞는 이치를 실행하는 정신개벽을 ‘힘닿는 대로’ 추구하자고 요청하는 원불교의 원만(圓滿)한 마음공부법은 무엇이든 완벽한 성취를 강요당하는 현대인들에게 위안이 되는 가르침을 전한다.

외래 종교인 기독교를
개벽종교라 말할 수 있는가
K사상과 기독교. 둘 사이에는 아무런 접점도 없을 듯하다. 하지만 페미니스트 신학자인 이은선과 한국적 생명신학을 연구해온 이정배가 유·불·선의 동양사상은 물론, 개벽사상과 기독교 신학의 만남을 희구했던 우리 토착 신학자들의 노력과 한계를 말한다. 익히 알려진 다석 유영모, 씨ᄋᆞᆯ 함석헌뿐 아니라 서구신학과 변별되는 개벽사상으로서 ‘원(圓)-기독교’의 가능성을 제시한 변선환, 유교의 효(孝) 사상을 신학과 접목한 윤성범, 초현실주의와 동학에 관한 관심에서 출발해 독특한 자기 신학을 전개한 이신 등 기독교 신학의 토착화에 큰 족적을 남긴 우리 신학자들의 흥미로운 사유가 펼쳐진다. 이들의 사유에 대한 검토는 서방에서 도래한 기독교 또한 개벽종교라 말할 수 있는지, 예수 또한 개벽사상가라 말할 수 있는지를 묻고 답하는 흥미롭고 치열한 토론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백낙청은 서양 작가로서 드물게 현대문명을 발본적으로 전환하려는 노력을 기울인 D. H. 로런스를 개벽사상가로 끌어들인다. 한편 페미니스트 신학자 이은선은 한국 기독교와 종교계에 내재된 가부장성과 경직성을 해체하고 임윤지당, 강정일당 등 조선시대 ‘여성선비’들의 사유에서 다시금 새로운 신학을 길어올려야 한다고 제안한다.

개벽세상을 위한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K사상의 자랑은 그것이 남다른 실천의 역사와 함께해왔다는 사실이다. 이 책에 소개된 개벽사상·개벽운동·개벽종교의 면면을 따라가다보면 갑오년(1894) 동학농민혁명에서 3·1운동이라는 대사건, 그리고 2016~17년의 대항쟁이었던 촛불혁명에 이르기까지, 역사적으로 한계에 부딪힐 때마다 사람들의 마음을 일으키고 새 세상의 변혁을 추동한 것은 결국 우리 정신사의 면면에 흐르고 있는 후천개벽의 사상임을 깨닫게 된다.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말기라는 높은 벽을 또다시 마주하게 된 지금, 이 한계 국면을 새롭게 돌파하기 위해서라도 우리가 지금껏 주체적으로 만들어왔고 사람다운 삶을 쟁취하기 위한 방편으로 삼아왔던 ‘개벽사상’의 연마가 절실하다. 민중의 ‘고혈마’나 다름없는 세력의 득세를 목도해야 하는 오늘날, K사상을 수반하는 역사적 실천과 변혁운동이 지난날의 촛불혁명으로 멈출 리 없음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다정한 수학책


수전 다고스티노  저 / 김소정 역 / 20,000원 / 해나무


2023년 미국수학협회 ‘오일러 북 프라이즈’ 수상작!
『이상한 수학책』 저자 벤 올린 추천!

『다정한 수학책』은 재미있고 흥미로운 수학 이야기와 엉뚱하고 유쾌한 스케치를 통해 내면의 수학적 사고를 깨우고 삶의 교훈을 얻을 수 있는 책이다. 수전 다고스티노는 고등학교 때 미적분 시험을 망치고 10년 동안 수학을 포기했다가, 스스로의 마음속에 수학에 대한 열망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대학으로 돌아가 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수학에서 멀어졌다가 돌고 돌아 다시 수학과 함께하게 된 경험을 통해, 저자는 누구나 수학을 사랑할 수 있고 수학적 사고 능력을 내면에 갖추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프랙털 구조, 대칭, 퍼지 논리, 매듭 이론, 펜로즈 패턴, 쌍둥이 소수,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 위상 수학, 게임 이론 등 저자가 직접 그린 300개의 스케치와 함께 재미있고 기발한 수학 이야기를 듣다 보면 누구나 내면에 잠자고 있던 수학자가 깨어나는 순간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 수학을 사랑하던 때가 있었다.”
자상한 수학 선생님의 엉뚱하고 유쾌한 스케치와 함께하는
인생과 수학의 교집합을 찾아 떠나는 수학 여행

○ 종이를 접어서 달에 닿을 수 있을까?
○ 런던 사람들 중에 머리카락 개수가 정확히 같은 사람이 있을까?
○ 털북숭이 공을 완벽하게 빗는 방법이 존재할까?
○ 자신이 미로 안에 있는지 밖에 있는지 판별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 바이러스는 왜 기하학적인 모양을 가지고 있을까?

"고등학교 때 미적분 시험을 망친 뒤로 나는 수학을 버렸다." 사람들은 수학을 사랑하든 수학을 미워하든지 간에 수학에 강렬한 감정을 품고 있다. 그리고 수학을 미워하는 이들은 대부분 수학을 미워하게 된 어떤 계기를 기억하기 마련이다. 수학 시험에서 나쁜 점수를 받거나, 수학 선생님에게 혼나거나, 지루한 수학 수업을 경험하거나 말이다. 『다정한 수학책』의 저자 수전 다고스티노 또한 고등학교 때 수학 시험을 망친 이후로 더 이상 자신의 인생에 수학이 끼어들 자리는 없다고 생각했었다.
대학교에서 인류학과 영화를 전공하고 졸업 이후에도 수학과 관련 없는 삶을 살던 다고스티노는 스스로의 마음속에 수학에 대한 열망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대학으로 돌아가 수학을 공부해 박사 학위를 받았다. 자신의 경험을 살려 학생들에게 수학을 가르치고 수학 교육 정책에 관해 주 정부에 조언을 하기도 했던 그녀는 수학을 주제로 다양한 사람들을 인터뷰하면서 누구도 태어날 때부터 수학을 싫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 책을 쓰게 되었다.

“이 책은 단 한 번의 실패로더는 수학을 잘하게 되는 날은 없으리라고
잘못 생각해버린 어린 시절의 나에게 주고 싶은 책이다.”

『다정한 수학책』은 재미있고 흥미로운 수학 이야기와 엉뚱하고 유쾌한 스케치를 통해 내면의 수학적 사고를 깨우고 삶의 교훈을 얻을 수 있는 책이다. 저자는 누구나 수학을 사랑할 수 있고, 수학적 사고 능력을 내면에 갖추고 있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단지 “직접 수학을 고민하고 그것에 귀를 기울이고 매혹되어 볼 기회”가 없었기에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우리 내면에서 잠자고 있던 수학자를 깨우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는 책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프랙털 구조, 대칭, 퍼지 논리, 매듭 이론, 펜로즈 패턴, 쌍둥이 소수, 무한,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 등 다양한 수학 주제를 쉽고 친절한 어투와 300개가 넘는 스케치를 통해 설명한다. 종이를 접어서 달에 닿을 수 있을까? 서울 사람들 중에 머리카락 개수가 정확히 같은 사람이 있을까? 털북숭이 공을 빗는 완벽한 방법이란 무엇일까? 자신이 미로 안에 있는지 밖에 있는지 판별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학교에서는 절대 배울 수 없는 ‘수학 너머에 있는 수학적 생각’들은 수학이란 그저 계산하고 공식을 암기하는 학문이라고 생각하는 독자들에게 수학의 아름다움과 재미를 알려준다.

“수학 책을 읽는 과정은 소설책이나 신문을 읽는 과정과는 다르다.
수학 책은 천천히 읽어야 하고, 잠시 멈춰 생각해보다가
다시 읽는 과정을 반복해야 한다.”

『다정한 수학책』은 수학에서 한 때 멀어졌다가 돌고 돌아 다시 수학과 함께하게 된 경험을 통해 저자가 수학을 통해 깨달은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도 말한다. 독자들은 이 책을 읽으면서 답이 있는 문제에 고마워하고, 변화를 받아들이고, 나만의 속도로 걷고, 관점을 바꾸고, 비교를 거부하고, 신념을 가지고, 더 자주 실패하고, 아름다움을 찾고, 상상력을 기르고, 성공의 의미를 직접 정의해볼 수 있을 것이다.
『다정한 수학책』은 3부 46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장은 하나의 수학 개념을 다루고 있는 독립적인 장이기 때문에 순서대로 읽지 않아도 된다. 1부, 2부, 3부 순으로 난이도가 어려워지며, 1부에서는 비교적 친숙한 사건과 수학 개념을 다루다가, 3부에서는 추상적인 개념을 다룬다. 저자가 직접 그린 300점 가량의 우스꽝스럽지만 귀여운 스케치가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다. 각 장의 마지막에는 연습문제가 있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수학의 영역을 넘어 삶에도 적용할 수 있는 교훈을 얻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다시 수학으로의 여행을 시작할 방법, 삶에서 수학을 재건할 방법이며, 내면의 수학자가 자유롭게 풀려나 재능을 발휘할 수 있게 해줄 방법이다.











나는 치우천황이다

이경철 저 / 14,800원 / 일송북


고대로부터의 빛, 배달 민족의 르네상스를 위해

문학평론가이자 시인인 이경철씨가 상고시대 동아시아를 호령하며 황하문명보다 앞선 세계 최초의 문명을 낳은 치우천황을 여러 측면에서 살핀 『나는 치우천황이다』를 펴냈다. 치우천황은 축구 국가대표 서포터즈 붉은 악마 깃발로 우리 민족의 용맹과 지혜를 휘날리며 오늘도 살아 있는 상고시대 실제 인물.
신화로 치부되기도 하는 단군왕검 너머 우리 민족 시원의 역사를 찾아가게 하는 이정표가 치우다. 동서양을 잇는 실크로드와 동아시아 전역을 국경 없이 넘나들며 활동하던 민족 초창기 역사를 증명하는 실재가 치우다.
김지하 시인과 더불어 고대 연구가들과 함께 치우천황을 연구한 저자는 문헌학, 고고학, 인류학, 민속학, 신화학 등 여러 측면에서 폭넓게 치우천황을 파고들며 신화와 뒤섞인 우리 상고사의 실제를 전하고 있다. 책 후반부에서는 중국의 시조인 황제 헌원과 치우천황이 벌인 농경 대 유목 간의 인류 최초 세계대전인 탁록대전을 소설식으로 박진감 있게 재현해 놓았다. 그러면서 민족의 정체성과 21세기 신유목, 첨단 문명시대를 인간답게 이끌어갈 비전을 치우천황에서 찾고 있다.









나는 사임당이다

이순원 저 / 14,800원 / 일송북


현모양처로 이데올로기화된 신사임당 삶의 실상

사실에 충실한 ‘정본소설’ 『신사임당』을 펴내 화제를 모았던 소설가 이순원씨가 현모양처로 신격화된 신사임당 당대의 삶과 실상을 역사적, 문헌적으로 고증하며 바람직한 인간상과 여성상을 살핀 『나는 신사임이다』를 펴냈다. 이율곡의 어머니면서도 남존여비 조선 사회에서 그림 등으로 이름과 족적을 뚜렷이 남긴 유일한 여성이 신사임당이다.
그럼에도 신사임당은 야사와 풍문으로만 우리에게 이데올로기화 되어 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현모양처로 정답이 정해져 있다. 그런 사임당을 역사적으로, 또 문헌적으로 가장 정확하고 바른 모습으로 보며 그녀의 삶을 사실적으로 전하고 있다.
오늘도 5만 원권 지폐에 초상화로 실려 널리 유통되고 있는 신사임당. 그녀의 실제 삶을 정확히 복원하며 오늘의 여성상, 교육상을 다시 한번 반성하게 하는 책이 『나는 신사임당이다』다.










나는 퇴계다

박상하 저 / 14,800원 / 일송북


성리학으로 왕도정치를 내세운 퇴계의 삶과 학문

『보수의 시작 퇴계, 진보의 시작 율곡』 등과 함께 많은 역사소설을 쓴 소설가 박상하씨가 이퇴계의 삶과 정치, 그리고 학문을 통해 이 땅의 진보주의 뿌리를 모색해 본 『나는 퇴계다』를 펴냈다. 한국을 넘어 세계적으로 영향을 끼치고 있는 도의철학(道義哲學), 퇴계학의 창시자이자 실천자가 이퇴계다.
퇴계는 ‘완전한 인간’을 위한 학문 곧 성리학을 왕조정치의 이상으로 구현하고자 몸부림친 큰 선비다. 공자와 맹자처럼 당쟁과 사화로 얼룩진 현실정치를 기웃거리지 않고 은거하며 학문을 닦고 제자를 길러내며 학문과 교육으로 시대의 방향성을 찾는 데 여생을 바쳤다.
보존과 수호의 가치가 변화의 가치보다 소중하다는 보수 정신의 사표가 퇴계. 그런 퇴계의 발자취와 학문, 그리고 정치를 통해 오늘의 보수주의를 반성하고 있는 책이 『나는 퇴계다』다.






나는 율곡이다

박상하 저 / 14,800원 / 일송북


오로지 백성을 위해 모든 것을 바꾼 진보주의 맹아 이율곡

『율곡 평전』 등과 함께 많은 역사소설을 쓴 소설가 박상하씨가 이율곡의 삶과 정치를 통해 이 땅의 진보주의 뿌리를 모색해 본 『나는 율곡이다』를 펴냈다. 신사임당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문재를 날리다 13세의 어린 나이로 과거에 장원급제한 천재. 벼슬로 나가 결코 양지의 권력이 아닌 고통 받는 음지의 백성들을 한사코 위했던 인물이 이율곡이다.
동, 서 사림 양쪽으로부터 잔인한 핍박을 받았으나 오직 개혁에 온몸을 내던진 올곧은 실천으로 나아갔다. 제아무리 지엄한 법률로 정하였다 하더라도 백성을 위한 것이라면 백 번이라도 ‘바꿀 수 있다’고 한 진보주의자가 율곡이다.
꽝꽝 얼어붙은 보수의 대지 위에 홀로 거역하여 진보의 씨앗을 움 틔운 고독한 이단아 율곡. 우리 유전자 속에 진보의 맹아를 뿌린 율곡의 삶과 정치를 통해 지금 우리 사회의 올바른 진보주의를 모색하고 있는 책이 『나는 율곡이다』다.









나는 백석이다

이동순 저 / 14,800원 / 일송북



백석 시인이 육성으로 조곤조곤 들려주는 삶과 시
국내 최초로 『백석시전집』을 발간해 백석을 독자들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으로 우뚝 서게 한 이동순 시인이 그의 일대기를 사실적으로 다룬 『나는 백석이다』를 펴냈다. 백석은 민족의 심사와 시대 상황을 보석 같은 우리 모국어로 담아 민족혼을 지켜낸 시인이다. 특히 기생 자야와의 사랑과 ‘나와 나타샤와 당나귀’라는 시로 일반에도 널리 알려진 시인이 백석이다.
고향 정주에서의 어린 시절 꿈과 공부. 일제하 서울에서의 시 쓰기와 일본 유학, 기생과 시인의 이뤄질 수 없는 사랑, 만주 유랑시절의 끝없는 허탈감, 삼수갑산에 유배된 북한에서의 분노와 회한, 삶의 허탈과 덧없음 등등. 알려지지 않았던 시인의 이야기와 그 속내의 비밀까지 사실적으로 밝히고 있다.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백석의 육성으로 직접 조곤조곤 들려주고 있어 살갑게 내밀한 이야기까지 다 전하고 있다. 저자는 “나는 백석 시인의 영혼에 빙의(憑依)가 되어 당신의 말씀을 단지 열심히 대필하며 옮겨 적었을 뿐”이라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나는 윤이상이다

박선욱 저 / 14,800원 / 일송북



분단의 희생자 윤이상, 화합과 평화의 삶과 음악

 

『윤이상 평전』 등을 펴내며 끊임없이 윤이상을 연구해 널리 알리고 있는 박선욱 시인이 『나는 윤이상이다』를 펴냈다. 저자는 이 책에서 민족혼과 신명을 서양 현대음악으로 드러낸 세계적 작곡가 윤이상의 삶과 음악 세계를 사실적으로 전하며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어도 변할 수 없는 민족의 혼을 둘러보게 하고 있다.

통영에서 태어나 일찍이 서양음악을 접하고 일제하 항일운동을 벌였던 윤이상. 그는 독일로 건너가 작곡가로서 민족의 얼을 드높인 현대음악의 거장으로 널리 추앙받았다. 남한에선 동베를린사건의 간첩 혐의로 박해받고 북한에선 환영받던 분단의 희생자이기도 한 윤이상. 『나는 윤이상이다』는 그의 파란만장한 삶을 조명하는 책임과 동시에, 서양 현대음악의 기법으로 민족혼이 밴 음악을 표현함으로써 민족의 정체성을 찾으며 남북으로 분단된 현실을 직시하는 길이 무엇인지 묻고 있는 책이다.









올리버 트위스트

찰스 디킨스 저 / 윤혜준 역 / 18,000원 / 창비



19세기 런던 거리의 생생한 광경이 선사하는 재미
파란만장한 삶의 여정 끝에 더욱 빛을 발하는 인류애와 감동

빅토리아 시대 영국 계급사회에 대한 거침없는 풍자
대중소설과 사회소설의 면모를 두루 갖춘 찰스 디킨스의 대표작

생생한 인물 묘사와 더불어 날카로운 사회 비평적 면모로 19세기 최고의 영국 작가로 손꼽히는 찰스 디킨스의 대표작 『올리버 트위스트』의 개정판이 창비세계문학 94번으로 출간되었다. 이번 개정판은 2004년 영미문학연구회 번역평가사업단이 가장 좋은 국내 번역본으로 선정한 윤혜준 교수의 촘촘한 번역을 살리되, 일부 표기를 바꾸고 오기를 바로잡아 새롭게 독자들을 찾아간다. 영화·드라마·뮤지컬 등 수많은 2차 창작물로 국내에도 수차례 소개된 인기 콘텐츠의 원작을 가장 정확하게 만나볼 수 있는 기회다.
“『올리버 트위스트』가 디킨스 문학의 특징적 면모를 잘 보여주는 것은 무엇보다도 이 소설에서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과 상업적 대중성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다는 점”(작품해설)이다. 계층과 형편에 관계없이 산재하는 인간의 다양한 본성을 조명하고 불합리한 구빈제도와 사법제도를 신랄한 유머로 비꼬면서 당대 영국 계급사회의 모순을 날카롭게 풍자한 이 작품은 “디킨스 장편들의 전형 내지는 원형”(작품해설)을 보여주고 있다. 격변하는 서사와 못내 웃음을 자아내는 풍자는 한장을 펼치기 무섭게 다음 장으로 페이지를 넘기게 만든다. 어린 올리버의 인생 여정을 따라가다보면, 인간 군상에 대한 디킨스의 탐구 정신과 지적인 유머의 품격을 느낄 수 있다.


어린 소년 올리버의 험난하고 진진한 모험담
지극한 비참에도 훼손되지 않는 영혼


영국 어느 소도시에서 한 아이가 태어난다. ‘올리버 트위스트’로 이름 붙여진 이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고아가 되어 구빈원(영국 국교의 행정단위인 교구의 책임 아래 극빈자들을 반강제적으로 수용하는 곳, 옮긴이주)에서 자란다. 그는 갖은 수모를 겪고 고향을 떠나 무작정 런던으로 향하고, 우연히 페이긴 영감을 필두로 하여 소매치기를 일삼는 무리에 흘러들어간다. 그리고 페이긴 일당에 의해 신사 브라운로우의 손수건을 훔친 도둑으로 몰리게 된다.
올리버는 따뜻한 심성을 가진 브라운로우 덕분에 누명을 벗고, 소매치기 무리에서 벗어나 보살핌을 받는다. 그러나 이내 다시 뒷골목을 전전하는 사익스와 낸시에게 납치되어 페이긴 일당에게로 돌아가고 만다. 올리버는 도둑질을 강요당하는 상황에서도 특유의 올곧고 맑은 천성으로 끝까지 저항하고 총상을 입은 채 메일리가에 의해 발견된다. 메일리가는 그를 거두어 온정 어린 친절을 베풀지만, 올리버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더 큰 범죄와 그를 향한 모략이다. 흥미진진하다 못해 파란만장하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올리버 트위스트의 유년기 모험담은 그의 투명한 성품으로 인하여 거듭되는 역경 틈에서도 꺼지지 않는 빛을 발한다.

계층을 종단하여 탐조하는 인간 본성의 집약체
범죄와 부조리를 넘어서 승기를 잡는 선의 원리

1837년부터 『벤틀리의 잡지』(Bentley’s Miscellany)에 연재된 『올리버 트위스트』는 발표 직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고난 속에서도 때 묻지 않는 어린 올리버의 고결한 성품과 한치 앞도 가늠할 수 없는 그의 역경은 계급에 관계없이 독자들로 하여금 계속해서 다음 편을 기다리게끔 만들었다. 19세기 런던 거리의 명암에 대한 거리낌 없는 고발과 더불어, 평생을 비참하게 살아왔음에도 특유의 영민함과 마음 깊은 곳에서 길어 올린 애정으로 올리버에게 결정적인 도움을 주는 낸시의 희생은 사람들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안겼다.
디킨스는 유년시절 악화된 집안 형편으로 인하여 구두약 공장에서 혹독한 노동환경을 몸소 체험한 바 있다. 그는 어린 올리버에게 가해지는 가혹행위와 굶어 죽는 하층민의 곤궁함을 구체적으로 그리는 데에 심혈을 기울이며, 1834년 영국 의회가 제정한 신(新) 구빈법을 강하게 비판했다. 새롭게 제정된 구빈제도는 공리주의에 입각해 빈민을 게으른 사람들로 분류하고 이들에게 최저생계임금 미만의 구호만을 지원해야 한다는 이념하에 도입되었다. 여기에 더하여 중간 관리자의 횡령과 폭력은 빈민 착취의 구조를 체계화했다. 디킨스는 『올리버 트위스트』에서 구빈원을 주된 배경으로 삼아 일꾼에서 말단 교구 관리, 교구 이사에 이르기까지 계층을 가리지 않고 풍자하여 당대 구빈제도와 사법제도의 허상을 낱낱이 폭로했다. 막을 틈 없이 새어 나오는 조소 끝에는 씁쓸하면서도 속 시원한 뒷맛이 감돈다. 이와 같은 사회소설적인 면모는 런던 뒷골목의 생생한 묘사나 낸시의 입체성과 더불어서 범죄소설의 요소를 강화하여 독자들의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단행본 서문에서 디킨스는 “어린 올리버를 통해 선의 원리가 온갖 역경 속에서도 살아남아 끝내 승리하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10면)고 밝혔다. 이 세대에 선이 이토록 선명하게 승리하는 이야기는 드물다. 절대적인 선악 구분이 사라진 시대에 출간된 지 200년을 향해 가는 이 작품은 어떠한 맥락에서 현재와 공명할 수 있을 것인가. 올리버는 숱한 고난 앞에서도 친구 딕의 진심 어린 축복, 브라운로우가의 살뜰한 보살핌 그리고 메일리가의 다정한 환대를 마음 깊이 새기고 살아간다.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은 바로 그런 기억들이다. 깊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애정과 응원이 서로를 지탱하고 연대하도록 하는 힘이 된다는 사실은, 『올리버 트위스트』를 집어 드는 지금 여기의 독자들에게도 변함없이 굳건한 울림으로 다가올 것이다.









어려운 시절

찰스 디킨스 저 / 장남수 역 / 17,000원 / 창비



획일적인 산업사회의 이념에 맞서
자유로운 상상력의 가치와 개개인의 존엄을 옹호한 디킨스의 수작
몰입감 있는 전개와 특유의 재기 넘치는 묘사로 오랫동안 사랑받은 찰스 디킨스의 장편소설 『어려운 시절』이 창비세계문학 95번으로 새롭게 출간되었다. 가진 자의 허위의식과 갖지 못한 사람들 고유의 생명력을 밀도 있게 그려낸 이 작품은 물질만능의 사회에서 공허감과 허전함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에게 여전히 유효한 커다란 울림을 선사한다. 디킨스 전문 연구자인 울산대 장남수 교수는 영미문학연구회와의 공조를 통해 이룬 명징하고도 섬세한 번역으로 대중성과 예술성을 고루 갖춘 작품의 매력을 고스란히 펼쳐 보인다. 특히 작품의 세세한 표현에 담긴 의미까지 정밀하게 짚어낸 역자의 해설은 디킨스 작품세계의 본령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출간 이후 충실한 고전연구의 성과로서 이 책이 주목받은 이유다.


날카롭고 거침없는 세태 비판과 풍자


작품의 무대인 영국의 공업도시 코크타운은 공장과 증기기관의 도시이자, 노동자들의 도시, 수치화할 수 있는 효용만이 절대적인 이른바 공리주의 이념이 지배하는 도시다. 소설은 공리주의를 대변하는 인물인 국회의원 그래드그라인드가 교실에서 아이들에게 상상을 억압하는 그의 교육철학을 장황하게 늘어놓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의 딸 루이자와 아들 톰 역시 아버지의 엄격한 원칙에 따라 모범적인 학생으로 길러지지만, 이들의 인생은 그래드그라인드가 꿈꾸는 이상과는 거리가 먼 방향으로 전개된다. 상상과 애정을 억압당한 채 자란 루이자는 스무살 연상의 자본가 바운더비와 애정 없는 결혼을 하고, 톰은 방탕한 생활에 빠져 도박과 강도에 연루된다. 이처럼 그래드그라인드로 대변되는 공리주의 이념은 개인의 타고난 양심과 자연스러운 감정을 무참히 짓밟고 인물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든다.

획일적인 이념에 스러지지 않는 민중 개개인의 존엄

이야기의 다른 한편에는 산업문명의 착취와 억압에 시달리는 노동자계급의 비극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인 스티븐 블랙풀이 있다. 성실한 노동자인 그는 노동자총연맹에 가입하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동료 노동자들로부터 외면받고, 공장주인 바운더비로부터는 불합리한 해고를 당한다. 결국 코크타운을 떠날 수밖에 없게 된 그는 나아가 톰 대신 은행 도난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누명까지 뒤집어쓴다. 그럼에도 그는 동료 노동자들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지 않고, 사람들이 이해와 연대 속에서 살아가기를 기도한다. 디킨스는 그를 통해 물질적 가치로 환원되지 않는 노동자 개개인의 존엄을 옹호한다. “엔진에는 신비가 없지만 일손들은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에게도 헤아릴 수 없는 신비가 존재한다”(112면)라는 표현에서처럼 노동자계급에 대한 디킨즈의 애정 어린 시선은 소설 곳곳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상상력과 연대의 가치


디킨스의 이러한 산업사회 비판이 소설에서 가장 극적으로 형상화되는 것은 코크타운의 공장과 대비되는 곡마단의 존재를 통해서이다. 곡마단은 소설 곳곳에 등장하는 민담과 민요 등의 의미를 부각하고, ‘사실’의 세계와 대비되는 ‘상상’의 세계를 대변하며, ‘노동’의 원리와 배치되는 ‘놀이’의 가치를 웅변한다. 곡마단의 단원들은 학식은 보잘것없지만 ‘놀랄 만한 부드러움과 천진함’(63면)을, ‘서로 돕고 동정하려는 지칠 줄 모르는 열성’(63면)을 지닌 이들이다. 이들은 소설의 처음과 끝에 등장해 서사에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맹목적인 이윤 추구와 대비되는 공동체적 가치를 드러낸다. 특히 곡마단 출신의 정 많은 소녀 시시 주프는 ‘사실’과 ‘이성’의 억압 속에서도 따뜻한 본성을 잃지 않고 여성 등장인물들 간의 연대를 주도하는 등 작품의 극적인 맥락 속에서 도드라진 영향력을 발휘한다.

 
19세기 자본주의의 이념으로서의 공리주의가 포섭하지 못하는 삶의 다양성과 민중적 덕목을 옹호한 디킨스의 문제의식의 강렬함은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더구나 그의 장기이기도 한 흥미진진한 이야기 전개와 생생한 묘사는 그가 당대에 획득한 대중적 인기를 오늘날에도 쉽게 공감할 수 있게 한다. 『어려운 시절』은 디킨스의 소설이 고전 중의 고전으로 평가받는 까닭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고전의 현재적 가치를 되새길 기회가 될 것이다.


옮긴이의 말

『어려운 시절』에서 드러나는 디킨스의 생각은, 대상의 총체적 연결이나 수치로 계량화할 수 없는 가치에 적대적이게 마련인 이런 식의 계산법으로는-그것이 그 나름의 관찰과 계산에 근거해 각 부분체계의 합리성을 아무리 달성한다 해도-실질적인 행복과 진정한 합리성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 산술과 추상의 정신에 기초한 그래드그라인드의 원칙은 크게 보아 근대적 산업기술과 자본제 생산양식의 핵심원리에 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많은 개혁이 이루어진 지금에까지 그래드그라인드와 같은 이들이 겉모습만 달리한 채 여전히 번창하고 있는 현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난롯불이나 코크타운의 굴뚝을 보며 인생에 대한 공허감과 허전함을 곱씹는 루이자의 모습은, 어찌 생각하면 그래드그라인드의 세계에서 반복되는 일상에 지쳐 있는 현대인의 모습일지 모른다.

- 장남수














순한 먼지들의 책방

정우영 저 / 10,000원 / 창비



 
“잘 깨어났다, 아이들아
환희를 뿜으렴”
슬픔이 지나가고 새롭게 생명이 움트는 자리를 응시하는 사랑
땅의 시인 정우영이 전하는 살아 있음의 가치

올해로 등단 35년을 맞은 정우영 시인의 신작 시집 『순한 먼지들의 책방』이 창비시선으로 출간되었다. “전편이 죽음의 의미를 묻는 독특한 시집”(강형철)으로 주목받았던 『활에 기대다』(반걸음 2018) 이후 6년 만에 펴내는 다섯번째 시집이다. 시인은 “삶과 죽음, 필연과 우연, 있음과 없음, 세계 안과 세계 밖 같은 궁극의 문제들”(소종민, 해설)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과 사색의 세계를 펼친다. 삶의 정경을 바라보는 선한 마음과 애틋한 눈길, 뭇 존재에 대한 깊은 연민이 서린 맑고 투명한 시편들이 아름다운 잔상을 남긴다.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사회의 빠른 속도에 역행하는 듯 느리고 편안한 자신만의 언어로 “저마다 서로 다른 인생의 굴곡과 사연들”(해설)을 펼쳐내는 솜씨와 그 서정적 깊이가 놀라움을 선사한다. 무엇보다 ‘시는 삶’이라는 믿음을 견지하며 시와 삶과 세상을 받드는 시인의 겸손한 마음과 성실한 태도가 신뢰를 준다.



“그 자체로 사랑이면서
사랑을 베풀지 못했다고 자책하는 가쁜 숨결들”
그리운 마음으로 불러보는 아름다웠던 영혼들의 이름


정우영의 시는 시인의 성정만큼이나 차분하고 평온하다. 눈과 귀가 순해지는 듯하고, “누군가 목덜미를 가만가만 쓰다듬어주는”(「누군가 목덜미를 쓰다듬어주는 것처럼」) 듯한 따듯한 위무의 손길이 느껴진다. “몸에 밴 그리움”(「소라국시」)의 정서가 물씬 풍기면서 ‘바작, 장꽝, 독바우, 판소묏등, 살구낭구, 당산골, 정짓간, 부석짝, 허청, 시암터, 똥간, 하나씨’ 등 삶의 내력이 깃든 질박한 언어는 아늑한 정감을 불러일으킨다. 굴곡진 삶의 애잔한 풍경을 바라보는 시인의 눈과 귀는 언제나 낮고 작은 것들에게 열려 있고, 몸과 마음은 작고 여린 것들에게로 기울어 있다. 시집을 펼쳐 들고 “후미지고 할퀴인 곳 어디든” 불을 지피면 “여린 종족들”이 몰려와 “세상 나른한 표정”(「유성으로 떠서」)으로 불을 쬐는 진경이 펼쳐진다. 그의 시는 생명의 거처이자 영혼의 안식처이다. 시인은 아득한 기억을 더듬어가며 삶의 본향인 자연으로의 회귀를 꿈꾼다.
그렇다 하여 “연신 온몸을 달달부들 떨어대며 불편한 내 몸의 안위나 빌고”(「서산 마애삼존불」), “살구꽃 그늘 고이는 토방 마루에 앉아 꽃 타령이나”(「징후들」) 하려는 것은 아니다. 시인은 국가 폭력에 무참히 희생된 채 “무관심에 밟히고 바스러져 밀려나는 백골들”(「노랑나비 한마리」)과 “총보다 무섭다는 빨갱이라는 손가락질, 그 철벽” 같은 이념 갈등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맥없이 스러져간 안타까운 영혼들의 넋을 기리며 왜곡된 역사의 진실과 아픔을 되새겨본다. 나아가 자본의 탐욕으로 인한 기후위기와 사막에 폭설이 쏟아지는 전 지구적 재앙, “소와 돼지 수백만마리가 산 채로 땅속에 묻”히고 “닭과 오리 수천만마리도 땅 밑으로 끌려 들어”(「너머의 세계」)가는 생명 파괴의 참혹한 현장을 직시하며 살아 있는 것들의 목숨이 위태로운 비극적 현실을 잊지 않는다.


시린 세상 구석구석을 은은하게 데우는 선한 마음의 온기

시인은 관념이 아니라 구체적 실감 속에서 삶과 죽음의 의미를 겸허하게 짚어본다. “환영(歡迎)과 환영(幻影) 사이 갈림길”(「이순의 저녁」)에서 고뇌하는 시인의 “눈은 서걱거리고 귀는 쎄하게 앓는다”. 시인은 이것이 단지 나이가 들고 몸이 늙어서가 아니라 “못 들은 체 외면한 사정들”을 “잊지 않”고 “받아 적”(「징후들」)으라는 뜻이었음을 깨닫는다. 나아가 죽음은 생명의 소멸이 아니라 생이 또다른 국면에 접어드는 것이고 “우주도 본래 먼지로부터 팽창하고 있다”(「순한 먼지들의 책방」)는 이치에 도달하며 위기의 세계에서 함께 살아온 이들의 생애를 따스하게 보듬는다. 그렇게 “슬픔이 밀어 올린/새잎들로 부산스러운 아침”(「연두」)을 맞이하며 자연의 섭리와 생명의 질서에 순응하는 삶을 그려낸다.










로기완을 만났다 (리마스터판)

조해진 저 / 15,000원 / 창비

넷플릭스 화제의 영화 「로기완」 원작소설
신동엽문학상 수상작, KBS 선정 ‘우리 시대의 소설 50’
조해진이라는 굳건한 토대를 완성한 우리 문학의 찬란한 한걸음

타인의 아픔에 대한 가장 진정성 있는 고민
섬세하고 유려한 문장으로 그려낸 공감과 연대, 치유의 이야기
 
대산문학상, 이효석문학상, 백신애문학상 등 주요 문학상을 거머쥐며 탄탄한 작품성을 입증해온 작가 조해진의 신동엽문학상 수상작 『로기완을 만났다』가 작품의 영화화라는 반가운 소식과 함께 출간 이후 13년 만에 ‘리마스터판’으로 새롭게 단장하여 독자들 앞에 돌아왔다.
『로기완을 만났다』는 “이방을 떠도는 탈북인의 운명에 대해 놀랄 만큼 차분한 공감을 자아내는 넉넉한 품과 세심한 결”이 돋보이는 한편 “올올이 살아 있는 반성의 문체와 서럽도록 몽환적인 여로를 결합해, 소설에서 보편성이 어떻게 획득되는지를 설득력 있게 입증해냈다”(권여선)는 평으로 2013년 신동엽문학상을 수상한 이래 2021년에는 KBS와 한국문학평론가협회가 공동선정한 ‘우리 시대의 소설 50’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며 시간이 지나도 빛바래지 않는 한국문학의 중요한 성취로 꾸준히 거론되어왔다. 몰입감 넘치는 서사와, 거기서 파생되는 보편적인 감동에 집중해 2024년 3월 넷플릭스 영화로 제작되는 데 발맞춰 선보이는 이번 리마스터판에서는 깊은 울림을 선사하는 원작의 의미를 충실히 되새기되 최근의 정서에 맞게 일부 표현을 다듬어 새단장을 마쳤다.

삶의 이유를 찾아가는 숭고한 발걸음
혈혈단신으로 벨기에에 밀입국한 탈북인 ‘로기완’의 행적을 추적하며 타인에 대한 공감과 애정을 탁월한 솜씨로 그려낸 『로기완을 만났다』는 조해진 문학의 중요한 분기점이 되는 작품이다. 작품활동 초반부터 현재까지 꾸준하게 조해진은 현실적인 고난을 겪는 인물들과 황량한 내면의 밑바닥을 차분히 응시해왔으나, ‘로기완’을 만나기 이전 작품의 인물들은 위기에 당면해 현실을 회피하거나 자신 안으로 숨는 결정을 내리곤 했다. 하지만 작가적 고민이 한층 넓고 깊어진 『로기완을 만났다』에서 그들은 새로운 희망을 만난다. “인물들이 어느 순간 진실을 응시하면서 타인들과 연대하려고 하고, 희미하나마 희망을 찾으려” 하게 된 것이다. 작가에게 “살아 있다는 감각을 찾으려고 하고 다른 사람과 연대하려고 하는 게 오히려 더 큰 용기이고 더 문학적일 수 있다”(『세계일보』)는 깨달음을 주며 사고의 전환점이 된 작품. “저에게 세상을 이전보다 넓게 볼 수 있게 해준 시야와 연대와 사랑에까지 닿는 공감과 증여의 의미를 알게 해주었으며 끝내 살고 싶다는 마음을 품게 한 이 소설이 누군가를 만나 그 삶에서 새롭게 태어나길 희망해봅니다”(새로 쓴 작가의 말)라는 소망을 담은 작품. 『로기완을 만났다』 리마스터판을 통해 이제 더 많은 독자들이 진심어린 공감과 연대에 동참하고, 삭막한 일상 속에서 자주 잃어버리고 마는 ‘삶의 이유’를 찾는 여정에 오를 차례다.

“처음에 그는, 그저 이니셜 L에 지나지 않았다”
가장 비밀스러운 존재를 만나기 위한 경이로운 여정
이니셜 L, ‘로기완’은 함경북도 온성군 세선리 제7작업반에서 태어나 자랐고 생존을 위해 홀로 이역만리 벨기에로 밀입국한 스무살 청년이다. 함께 북한 국경을 넘은 어머니가 중국에서 비극적으로 세상을 떠난 뒤 그는 자신이 살아남는 것이 어머니의 마지막 소원이었음을 알고, 어머니의 시신을 팔아 마련한 돈 650유로를 목숨처럼 품에 안고 브뤼셀에 온다. 그러나 생존을 위해 당도한 낯선 타국에서 조국과 언어를 잃은 그는 견디기 힘든 가난과 멸시를 감내해야 하는 운명에 처한다.
소설은 로기완이 아닌 화자 ‘나’를 통해 서술된다. ‘나’는 불우한 이웃들의 사연을 다큐로 만들어 실시간 ARS를 통해 후원을 받는 방송 프로그램의 작가이다. ‘나’는 부모를 여의고 반지하방에서 뺨에 커다란 혹을 단 채 힘겹게 살아가는 출연자 ‘윤주’의 후원금을 늘리기 위해 윤주의 방송 날짜를 추석연휴로 미룬다. 그러나 이 선의의 결정으로 수술 날짜가 미뤄진 사이 윤주의 혹이 악성 종양으로 바뀌는 최악의 사태가 벌어진다. 자신의 연민 때문에 윤주가 깊은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었다는 사실에 ‘나’는 너무나 큰 죄책감에 휩싸이고 그길로 윤주에게서 등을 돌린다. 현실과 마주할 용기를 잃어버린 ‘나’는 우연히 읽게 된 시사잡지에서 탈북자 로기완의 이야기를 접하고 무작정 벨기에로 떠난다. 그곳에서 ‘나’는, 로기완이 자신의 행적을 기록한 일기를 구해 그의 자취를 되밟아나간다. 로기완에 대한 글을 씀으로써 잃어버린 삶에의 이유를 찾기 위해, 혹은 글을 쓰는 것이 진정 어떤 의미가 있을지를 다시 모색하기 위해. 요컨대 이 소설은 로기완의 ‘고난의 행군’에 대한 절절한 기록인 동시에 작가로서의 삶을 근본적으로 고민하는 ‘나’의 구도의 과정이기도 한 것이다.

연민과 유대가 빚어내는 가슴 벅찬 희망의 이야기
다른 사람에게 커다란 절망을 안기고 현실에서 도망치려는 ‘나’, 어떠한 보호와 책임으로부터 배제된 채 생존의 기로에 선 로기완, 어린 나이에 끝없이 상처를 입어야 했던 윤주, 그리고 숨겨진 과거로 평생 고통받아온 ‘박’까지, 『로기완을 만났다』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저마다의 아픔과 절망으로 힘겹게 살아간다. 서로 다른 나이와 직업, 환경을 가진 이들이 공통적으로 안고 있는 애달픈 이야기들을 통해 작가는 이 세계에서 하나의 어엿한 주체로 인간답게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위태로운 일인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들은 고통에 매몰되지만은 않는다. ‘나’는 얼굴 한번 보지 못한 로기완의 일기를 통해 타인을 연민하는 법을 체득해가고, 로기완은 나이와 인종의 벽을 넘은 ‘박’과 ‘라이카’와의 유대를 통해 삶의 의욕을 되찾는다. ‘나’와 ‘박’이 서로를 거울삼아 서서히 마음의 상처를 회복해가고, 윤주와 ‘나’가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거리에서 다시 균열을 메워나가는 과정 역시 끈기 있게 그려진다. 이렇듯 『로기완을 만났다』는 삶의 근원적인 슬픔을 말하는 동시에 연민과 유대를 통한 희망을 함께 역설한다. 저마다의 결핍과 갈등이 현실과 괴리되지 않은 진지한 사유 속에서 회복되어가는 과정은 삶의 남루한 기슭에 머무르는 이들 모두에게 묵묵한 위로를 선물한다.

풍부한 상상력과 사려 깊은 문장으로 쓰인 『로기완을 만났다』를 읽으며 우리는 누군가의 아픔에 예민하게 감응하고, 아픔의 사연을 샅샅이 들여다보며 그를 돌보는 것, 즉 문학의 이유를 마주하게 된다. 작품 속 누군가의 삶이 나 자신의 삶으로 전이되고, 끝내는 그를 가슴 깊이 이해하게 된다. 타인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일이 불가능하단 사실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로기완을 만났다』는 오히려 그 불가능과 타협하고 손쉽게 연민하려는 나약한 마음을 끊임없이 다그치고 몰아세운다. 순도 높은 공감과 연민에 이르기까지, 타인이라는 완고한 벽에 계속해서 부딪치고 깨지면서 그 한계와 환멸까지 끌어안고 한발짝이라도 더 타인에게 가닿으려는 진심을 전한다. 그리하여 “결코 타인을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통해 역설적으로 자신의 삶을 이해하는”(김연수, 추천사) 마법 같은 일이 벌어진다. 초판이 나온 후 13년이 지난 지금 시점에도 이 마법은 여전히 필요하다. 삶의 애환은 점점 다양하고 깊어지는 반면 타인의 고통을 대하는 우리의 감수성은 쉽게 무뎌지곤 하는 까닭이다. 내 주변을 살피는 예리한 시선과 상처를 돌보는 따스한 손길로 가득한 이 작품은 그래서 오랫동안 유효했으며 오래도록 유효할 것이다.
 
 
 

한국고전여성열전, 해동염사

차상찬 저 / 조지형, 박가희 역 / 23,000원 / 청아출판사
“남성 중심의 역사 속에서 이름난 여성들의 흔적이
매몰되고 사라져 가는 것이 안타까워 붓을 들다!”

나라를 다스린 여왕부터 주인의 원수를 갚은 충직한 충비까지
재주와 지혜, 공덕과 업적으로 능히 남성들을 압도했던 여성들 이야기
이 책은 일제강점기 문화운동가이자 언론인 청오(靑吾) 차상찬(車相瓚, 1887~1946)이 쓴 『해동염사(海東艶史)』를 현대인이 읽기 쉽게 풀어 옮긴 것이다. ‘해동(海東)’은 예전에 우리나라를 이르던 말이며 ‘염사(艶史)’는 여성의 역사를 뜻한다. 즉, 말 그대로 우리 역사 속 여성들의 이야기를 열전 형식으로 엮은 책으로, 남다른 재능과 지혜, 의지로 이름났던 여성 인물들을 한데 모았다. 지금과는 매우 달랐던 시대 상황 속에서 전통적 가치를 잘 구현한 여성은 물론, 현실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포부와 재능을 아낌없이 발휘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함께 다루었다. 이를 통해 여성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확장하고, 나아가 새로운 기대치와 요구를 이끌어 내려는 의도를 충실히 담아냈다. 흥미로운 이야기를 통해 당대 사람들의 교류와 생활상 등 예전 사회의 갖가지 모습을 엿보는 재미도 있다. 이처럼 역사와 문학 방면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녔으나 지금껏 구해 읽기 어려웠던 차상찬의 저작을 이 책을 통해 새롭게 만날 수 있다.


■ 차상찬과 『해동염사』

청오 차상찬은 일제강점기의 언론인이자 문필가로 문화운동의 선구자였으며, 지면으로 민중을 계몽하고 애국심을 고취한 인물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월간 종합지 『개벽(開闢)』을 창간하였고, 그 밖에 『별건곤』, 『신여성』, 『학생』, 『어린이』 등 여러 잡지의 발행을 주도하며 주간 또는 기자로 활약하였다. 최근 그의 이름과 업적이 재조명되고 있으며, 2010년에는 ‘제45회 잡지의 날’을 맞아 은관문화훈장이 추서되기도 하였다.

차상찬은 우리나라 반만년 역사 동안 정치가, 문장가, 음악가, 효녀, 충녀, 의녀 등 여성으로서 이름난 인물이 적지 않았음에도 이렇다 할 만한 여성 중심의 역사서가 없음에 유감을 표하였다. 그리하여 정사, 야사, 문집, 설화 등에서 여성에 관한 기록을 가려 뽑아 1937년 『해동염사』로 엮어 냈다.

차상찬의 『해동염사』는 우리나라 역사 속 다양한 여성들의 삶을 보여 주며 문학적으로도 가치가 있는 저작이나 지금껏 접하기가 어려웠다. 더구나 20세기 초중반의 문예적 특성을 반영하여 국한문이 혼용된 고풍스러운 만연체로 쓰인 데다 책 전체에 한시, 한문 산문, 시가 작품들이 삽입되어 있어 일반 독자가 이해하기에 쉽지 않았다. 이에 국어 교육 현장에 몸담고 있는 역자들이 저술의 내용과 특성을 손상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어휘를 풀어 쓰고 문장을 가다듬어 남녀노소 누구나 읽기 편한 독서물로 완성해 냈다. 이 책은 소장 가치가 충분하며 여러 방면에서 활용할 수 있는 귀한 자료가 될 것이다.

■ 그 옛날 남달랐던 여성들

이 책에는 총 여섯 가지의 카테고리 아래, 남다름으로 기록된 80여 명의 여성들이 등장한다. 궁중의 여왕과 비빈부터 양반의 부인과 첩, 기녀, 민간 여성에 이르기까지 상하 전 계층의 여성들 이야기를 두루 다루고 있다. 그들 중에는 남성과 사회가 요구하는 바를 충실하게 수행한 여성도 있었고, 그 이상으로 자신의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고, 역경과 고난 속에서도 기어이 목적을 이룬 여성들도 있었다. 재치 있는 시문으로 남성을 꾸짖은 명기, 가문을 일으켜 세운 눈먼 과부, 반정에 큰 공을 세운 단발 여승, 남편을 잡아간 호랑이를 때려 죽인 여인까지 저마다의 다양한 사연이 읽는 재미를 더한다.

지금의 시선에서 바라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 선택을 한 여성들도 있겠으나, 당시 여성에게는 많은 제약과 한계가 뒤따랐고, 여성에게는 특히 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었던 불평등한 구조 속에서도 자신의 의지대로, 저마다의 방식으로 제 삶을 살고자 했던 여인들을 만날 수 있다. 남성 중심의 역사 속에 묻혀 있던 여성 인물들을 새롭게 발견하고 그들을 기억하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방 안의 호랑이

박문영 저 / 17,000원 / 창비

SF어워드 대상 수상작가 박문영의 강렬한 첫 소설집
작고 소중한 존재들의 자리를 마련하는 아름다운 이야기들

놀라운 상상력과 특유의 따스함으로 평단과 독자들의 사랑을 받으며 SF어워드 중·단편소설(대상)과 장편소설(우수상) 부문 모두를 수상했을 뿐 아니라, 『주마등 임종 연구소』 등 다양한 작품을 부지런히 선보이며 작가적 세계를 확장해온 소설가 박문영이 소설집 『방 안의 호랑이』를 펴냈다. 등단 후 십여년의 시간 동안 꾸준히 발표해온 작품들을 묶어낸 첫 소설집이다. 열세편의 다채로운 이야기들로 구성한 이번 소설집에는 언뜻 보잘것없고 작게만 느껴지는 존재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박문영은 흐릿한 존재들의 이름을 다시 선명하게 새기고, 나아가 작은 존재들을 소외시키는 세계로부터 탈출해 조금 다른 세상으로 인도하는 안내자 역할을 기꺼이 맡는다. 소설을 읽는 독자들 역시 하루하루 바쁘게 흘러가 스스로조차 소외시키고 마는 이 세계에서 탈출해, “몸을 부드럽게 감싸”며 “괜찮”다(「무주지」)고 말해주는 ‘박문영 월드’에 입장한 뒤에는 비로소 제대로 숨이 쉬어질 것이다.


놀라운 상상력으로 복원해낸 이름들,
그 이름들에게 선물하는 아름답고 따스한 우주

『방 안의 호랑이』는 미미하고 희미하던 존재들에게 선명한 색을 입힌다. 표제작 「방 안의 호랑이」는 ‘작자 복원’ 프로그램을 개발해낸 미래를 배경으로 한다. 스캐너로 그림을 읽어내면 홀로그램 빌더 위에 그 그림이 그려질 당시의 풍경이 펼쳐진다. 소설은 유명 화가 뒤에 가려져 어두운 곳에서 그림을 그리던 이의 모습을 복원해내며, 그가 지녔던 생생한 호랑이와 같은 아름다움을 되찾아준다.
한편 「무주지」 속 ‘연음’과 ‘기정’은 무주지라는 일종의 지구의 대안공간에서 사는 클론이다. 무주지에서 클론은 ‘양육자’ 역할을 한다. 한두 사람이 아이를 키우는 데에서 무수히 많은 문제가 생긴다고 판단한 인류는 자신들을 대신해 몇년간 돌아가며 아이를 양육할 클론을 생산했다. 클론은 양육뿐 아니라 각종 위험을 수반하는 일에도 투입이 되는데, 연음과 기정은 자신들이 돌보던 아이를 다시 볼 수 있게 해준다는 약속을 믿고 탐사선에 탑승한다. 그들은 궤도를 벗어나 다른 행성에 불시착하게 되고, 모든 것이 끝났다고 여긴다. 그러나 낯선 행성의 신비로운 힘을 마주한 그들은 또다른 존재로 탄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품게 된다.
「누나와 보낸 여름」은 잇따른 재해로 다수가 빈곤해진 세상을 배경으로 하는데, 이 세상에서 인간들은 약자와 동물을 혐오한다. 그들의 혐오는 특히 개들에게로 향해 개들을 순하게 만드는 기계장치를 만들기에 이른다. ‘나’는 내가 기르는 개 ‘누나’를 보호하기 위해 창고 안으로 숨어든다. 얼마 지나지 않아 거대한 소용돌이가 몰아쳐오고, ‘나’와 ‘누나’ 그리고 개들만이 뜻하지 않게 놀라운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소설은 늘 죽음과 가장 가깝던 약한 존재들을 희망 쪽으로 끌어당긴다.
「회양목 사이로」의 인물이 새로운 세계를 선택하는 방식은 조금 더 독특하다. 미디어아트 행사를 보러 간 ‘나’는 그곳에서 말을 걸어온 영화 스태프에게 이상한 소리를 듣는다. 사실 ‘나’와 그는 만화에 등장하는 조연이고, 그들이 사는 세상은 그 만화를 각색한 영화를 본 한 노인의 머릿속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동안의 삶에서 가졌던 의문들이 스쳐가고, ‘나’는 비로소 ‘진짜’ 삶을 찾아가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마치 스케치처럼 흐릿하게 지워진 삶을 살던 존재들의 이야기는 우리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게 느껴진다. 누군가를 대체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삶, 나보다 더 약한 존재를 돌보지만 나 역시도 ‘약자’에서 그리 멀지 않은 삶, 아주 거대한 체제에 의해 그저 기능하고 있는 것 같은 삶을 사는 지금 이곳의 현대인이라면, 박문영이 마련하는 자리와 각각의 인물들에게 부여하는 색깔을 보며 마음이 두근거릴지도 모른다. 인물이 더 많은 색깔로 물들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우리 역시 조금씩 밝은 빛깔로 채워질 수 있으리라.
박문영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다양한 이야기들을 펼쳐내며, 독특함과 강렬함으로 가득한 박문영 월드에 독자들을 초대한다. 성적 페로몬을 반영한 색깔이 나타나는 링을 착용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가는 세상을 그린 「컬러 필드」, 월경과 통증에서 자유롭고 싶지만 신약의 가격은 너무 비싸 꿈도 꾸지 못하는 가난한 연인의 이야기를 담은 「주희, 상수」, 사고로 뇌의 일부만 남은 아이의 의식을 소파로 이식해 그 소파로 미세하게나마 아이의 흔적을 느끼는 인물이 나오는 「초록 소파」, 수치심을 제거하는 시술이 가능해진 세상에서 시술의 정당성을 두고 사회와 개인이 겪는 갈등과 고민을 담아낸 「수치 없는 세계」, 기술로 과거의 한 장면을 복원해낼 수 있다고 해도 그 장면 속에서 계속 머물러야 하는 과거의 존재에 대한 존엄성에 대한 문제를 다룬 「천검 관광」, 좋아하는 연예인에게 동화되어 그들이 느끼는 감각을 공유할 수 있는 ‘실감기기’ 시장이 보편화된 세상을 그린 「패나」, 유전자 편집이 가능해진 시대, 결혼 직전 커플의 갈등을 담은 「파경」, 앞으로의 삶이 어떻게 흐를지 예언해주는 프로그램이 큰 인기를 끄는 상황에서, 우연한 기회로 자신의 미래에 대한 예측을 듣게 된 주인공이 사실은 예언과는 다른 삶을 살았다는 것을 깨달으며 섬뜩함마저 느끼게 하는 「정생」, 그리고 독특한 소설적 실험으로 읽는 재미를 주는 「옥토버」까지. 『방 안의 호랑이』는 이 한권으로도 마치 놀이동산에서 여러 놀이기구를 즐기는 것 같은 재미를 선사한다. “흠 많고 나약한 존재들마다 하나의 우주를 선물하는” 박문영의 “사랑”(추천사 박서련)은 이를 읽는 이에게도 가닿아 오래도록 따스하게 기억될 것이다.










각본 없음
아비 모건 저 / 이유림 역 / 18,500원 / 현암사

“우리는 모든 것을 잃지는 않았다. 전부는 아니다.”
가끔 삶이 나도 모르게 쓰인 한 편의 드라마 같을 때가 있다. 때로 드라마가 아니라면 설명하기 힘든 일들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서프러제트〉 〈철의 여인〉 〈더 스플릿〉 〈셰임〉 등의 화제작을 집필하고 에미상을 수상한 극작가 아비 모건의 사랑과 상실에 관한 에세이다. 누구보다 그녀를 사랑하고 지지해 주던 배우자, 제이콥이 어느 날 갑자기 쓰러져 아비 모건에 관한 기억만 잃은 채로 한 편의 드라마 같은 이야기가 시작된다. 기억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몸도 마음도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사람이 된 제이콥. 아비 모건은 그가 제대로 살 수 있다는 희망에 차오르다가도, 때로는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하는 마음으로 기약도 없이 그 옆을 지킨다. 그런 아비 모건을 보면서도 제이콥은 “당신은 아비가 아니야”라고 선언하며 그녀를 무너뜨렸다. 이런 날들 속에서 아비 모건은 자기 연민에 빠져 있기보다 처한 상황들을 매순간 날카롭게 탐구하면서 특유의 강인함과 인내력으로 지나왔다. 그렇게 보낸 3년이라는 시간의 기록들이 이 책에 담겨 있다.
아비 모건은 직업적으로 늘 끝이 분명한 이야기를 좇으며 살아왔지만, 자기 자신의 ‘인생’이라는 작품에서만큼은 주어진 각본이 아닌 스스로 만들어 온 각본을 통해 끝까지 살아남은 주인공이다. 그녀의 이야기를 통해 당연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고, 그래서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 것들을 돌아볼 수 있다. 나아가 삶의 불확실성에 직면할 수 있는 의지와 용기를 찾을 수 있다.
하나 감당하기도 힘든 불행한 일들이 연이어 찾아올 때면 ‘왜 하필 나일까’ 싶은 마음에 그 상황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파도가 다가올 때 그 위로 몸을 실어 해안까지 닿아야 한다는 아비 모건의 말마따나 인생의 여러 재난들이 우리를 덮치려 할 때, 그 속으로 휩쓸리는 대신 위로 올라서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이를 대해야 한다. 어떤 일은 반드시 일어나야만 하는 것이라면 말이다.

메릴 스트립, 유진목 시인, 이다혜 기자 추천!
아비 모건은 냉소적인 태도를 유지하면서도 예리하고 충만한 정신력으로,
끝없이 가파른 삶의 절벽을 향해 숨 막히는 하이킹을 떠난다. _메릴 스트립

그녀의 이야기는 상황이 가장 어두울 때에도 웃음 짓게 하는 포인트가 있다.
매 순간 극적으로 전개되며 스릴러처럼 밀도 있다. _《더 가디언》

아비 모건의 사랑은 모든 것을 괜찮다고 말해주는 따듯한 입김처럼
절망과 행복이 교차하는 문장들 사이에 촘촘히 놓여 있다. _유진목

우리 삶에 비극이 일어나면, 알게 된다.
불완전한 행복이야말로 현재형의 삶이라는 사실을. _이다혜

이 이야기는 불쌍한 회고록이 아닌
사랑에 관한 것이다

소설 『데미안』에는 “사람은 자신의 세계를 넓혀준 사람을 잊지 못한다”라는 문장이 나온다. 누구나 한 명쯤은 그런 존재가 있을 것이다. 혼자서는 막연히 두려워 시도조차 하지 못한 일들을 ‘함께’라는 이름으로 선뜻 도전하게 만들어 준 사람. “세상에는 이렇게 멋진 풍경과 맛있는 음식과 재미있는 일들이 많아“라고 자주 말해준 사람. 아비 모건에게 제이콥이 그랬다. 그녀에게 제이콥은 믿어 의심치 않는 삶의 목적이자 이유였다. 제이콥이 한순간에 모든 걸 다 잃고, 자기 자신만 기억하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끝까지 그를 지키려 했던 건 이러한 기억 덕분이었다.
누군가는 그녀를 두고 “어쩌자고 그런 선택을 했어?” 혹은 “감당이 되겠어?”라고 말하며 도무지 이해 안 되는 표정을 지을 수 있다. 하지만 아비 모건은 그녀 앞의 재난이, 서로를 두고 “우리는 행운아야”라고 말하던 그들이 사랑했기에 필연적으로 겪어야만 했던 일임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녀가 지나온 선택들은 너무나 당연하면서도 명확한 것이었다. 아비 모건의 세계를 넓혀준 제이콥, 그리고 어떻게든 그 세계를 지키려했던 아비 모건.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우리 시대에 퇴색되어 가는 사랑의 본질과 가치를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다.







악의 회고록


김연진 저 / 16,800원 / 네오북스(네오픽션)


“나는 악인으로 태어났다.”
애석하게도 어린 날의 나는 알지 못했다.
순결한 인탈리엔을 집어삼킨 ‘악’이 얼마나 위험한 것이었는지…….
‘악’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나쁜 말이나 나쁜 생각, 나쁜 행위 같은 것을 애초에 할 줄 모르는 순결한 사람들만이 모여 있는 세상을 말이다. 만약 그런 세상이 존재한다면, 그곳을 살아가는 인간들의 ‘본성’은 ‘나쁘다’는 것의 대척점에 있는 ‘착한 것’에 의해 결정되는 것일까? 이 험난하고 지난한 현실 속에서, 우리는 이러한 평화로운 세상을 한 번쯤 꿈꿔볼 수 있겠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예로부터 인간의 성악과 성선에 대해 끊임없는 논쟁을 펼쳐온 역사가 증명하듯, 인간의 ‘선’과 ‘악’은 동시에 존재할 수밖에 없음을 말이다. 그렇다면 ‘악’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란, 정확히는 ‘악’을 깨닫지 못한 자들의 세상이겠다. ‘선’한 사람들이 일구고 이룬 평화로운 땅에 태초의 ‘악’을 자각한 이가 깨어난다면 그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이러한 물음에, 기다렸다는 듯 정확히 그 세상을 창조해낸 작가가 탄생했다.
서로가 서로를 위해 살아가는 ‘위대한 정신’을 가진 자들이 모여 숭고하고 고귀한 땅 ‘인탈리엔’을 만들었다. 그들은 어렸을 적부터 위대한 선생과 스승으로부터 “서로를 돕고 도와서 결국엔 함께 행복해져야 하는 기쁜 사명”을 배운다. 타인의 기쁨이 곧 ‘나’의 기쁨인 세상이라……. 이 얼마나 아름답고 이상적이란 말인가. 인탈리엔에는 당연히 ‘선’이라는 개념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악’의 형상을 마주한 적이 없으니 그에 반하는 ‘선’이라는 것 자체를 정의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탈리엔에 “남들과 다르다고 처음 느낀” 한 아이가 있었으니, 바로 인탈리엔 최초의 악인 ‘말루스’다. 모두가 선한 인탈리엔인들은 단 한 명의 악인을 물리치고 계속해서 평온한 삶을 유지할 수 있을까? 더 나아가 그들의 ‘선’이 진정한 ‘선’이라고 할 수 있을까? 김연진 작가는 이러한 철학적인 고뇌를 소설에 녹여내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진정한 삶의 가치와 ‘나’ 자신, 그리고 ‘우리’의 의미를 되돌아보도록 돕는다. ‘악’의 시대가 도래한 인탈리엔에 초대된 독자들이여, 부디 이 천재적인 작가가 탄생시킨 ‘악’의 범람 속에서 무사히 돌아오기를 바란다.
 
최초의 악인, 말루스의 고해

인탈리엔은 “개인의 의견이 아닌 하나의 공통된 생각을 공유하는 것에서 행복을 느끼”는 ‘위대한 정신’을 가진 자들이 이뤄낸 순결한 땅이었다. 여덟 살의 말루스가 태초의 ‘악’을 자각하기 전까지는……. 어린 말루스에게 인탈리엔인들은 무기질적인, 살아 있지 않은 기계처럼 느껴졌다. 그들은 무조건적으로 타인의 행복을 바라며 개인의 삶에 주체성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말루스가 처음 남들과 다르다고 느꼈던 때는 한 친구의 윤기 나는 ‘펜’을 몰래 가져오고 싶다는 욕망을 느낀 순간이다. 말루스는 “누군가에게 사실이 아닌 것을 믿게 할 수 있”는 ‘거짓말’을 알게 되었고, “나를 속이는 거짓말”까지 할 수 있게 된다. 이제 남을 속이는 일만 남았던 말루스는 “다 너를 위한 일이야”라고 말하며 제 욕망이 욕구로 변하는 순간마다 남의 마음을 좌우하기 시작했다. ‘위하는 일’이라니, 착한 인탈리엔인들에겐 더없이 뿌듯하고 벅찼을 말이었을 터다.
말루스는 자꾸만 ‘위대한 정신’에 반하는 ‘어긋난 마음’의 근원을 찾고자 했으나, 인탈리엔의 현명한 노인조차도 정답을 알지 못했다. 당시의 말루스는 왠지 모르게 자신이 이방인이 된 듯한 그 허전하고 쓸쓸한 감정이 ‘외로움’이라는 것도 몰랐다. 눈물이란 기쁠 때에 흘리는 것이라 여겨온 인탈리엔에 ‘외로움’이나 ‘고독함’, ‘슬픔’ 같은 감정이 존재할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저 홀로 고통 속에 갇혀 타닥타닥, 고요하게 타오르는 불길에만 기댈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속에서 꿈틀대던 무언가가 절규하는 ‘비명’으로 발화되고, 수다스러운 인탈리엔인들과 다르게 고요하면서도 거대하게 솟아오르는 ‘불’을 지르는 것으로 행위되어 이윽고 ‘악’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을 때, 인탈리엔 최초로 ‘악인’이 탄생했다.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가는 ‘악’에 대한 갈망과 탐구에 빠져든 말루스의 눈에 띈, “불행히도 그의 악을 온몸으로 받아내야 했던 작은 소년이 있었으니” 바로 에스투스다. 말루스는 에스투스에게 악을 가르치며 자신만이 알고 있던 ‘악의 세계’로 에스투스를 끌고 오려 했다. 그리고 얼마간 말루스의 계획은 성공적인 듯 보였다. 하지만 잔잔한 호수에 돌멩이가 떨어지면 물결이 일렁이고 여러 겹의 파동이 굽이친다는 것을 그는 간과했다. 말루스보다 더한 ‘악인’이 된 에스투스가 인탈리엔에 ‘악’을 퍼뜨리고 인탈리엔이 힘없이 스러졌을 때가 되어서야 말루스는 깨달았다. “흘러넘치도록 내버려둔 악이 얼마나 위험한 것”이었는지. 말루스는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한 에스투스를 떠올리며 삶의 종장에 이르러서야 펜을 들었다. ‘악’의 시작이었던, 말루스가 훔친 에스투스의 윤기 나고 예쁜 까만 펜을.
에스투스에게 바치는 고해이자 속죄인 『악의 회고록』은 이렇게 시작한다.

“친애하는 에스투스. 내 과오를 되돌릴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네만,
단 한 번만이라도 자네에게 속죄할 기회를 주겠나?”

최초의 선도자, 에스투스의 고백

언제나 에스투스는 말루스의 곁에 있었다. 말루스가 거짓말을 할 때도, 너무나 커져버린 ‘악’이 폭력으로 발현되었을 때도, 모진 말로 에스투스를 꿇어 앉혔을 때도. 그는 말루스가 행하는 ‘악’의 대상이 모두 자신을 향해 있음을 알았지만 모든 걸 감내하고 또 참아냈다. 고귀한 땅 인탈리엔의 ‘위대한 정신’의 표본이라 할 수 있는 그에게 있어, 말루스의 ‘악’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건 행복을 위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말루스가 ‘수확’하는 것이라 알려주며 남의 물건을 몰래 가져오라고 시켰을 때도, 그는 그릇된 행동임을 알지만 말없이 말루스의 뜻을 따랐다. 그 누구보다 남을 위하는 에스투스가 ‘위대한 정신’을 거스르는 행위를 실현했을 때, 그 자체로 이미 말루스보다 더한 ‘악’의 그림자가 에스투스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말루스의 벗이 되기를 자처한 에스투스는 그를 찾아가 ‘악’을 배웠다. 마치 스승과 제자의 관계처럼, 에스투스는 말루스로부터 ‘악’의 근원을 이해하고 그 모든 걸 기록해나갔다. 꽤 오랫동안 ‘악’의 담론을 이어가던 에스투스가 ‘악’의 반대 개념인 ‘선’의 근원을 깨우쳤을 때, 마침내 인탈리엔에 ‘선’과 ‘악’이 자리 잡았다. 에스투스는 그것에 그치지 않고 인탈리엔의 현명한 노인이자 말루스의 할아버지를 찾아가 ‘선’에 대한 체계를 구체화했으며 이내 『우리의 기쁨』, 『공동체의 기쁨』 『세계의 기쁨』을 출간한다. 그러나 바빠진 에스투스가 발길이 끊기자 말루스는 더욱 더 ‘악’에 고립되었으며, 어느 날 갑작스레 겪은 할아버지의 죽음으로 ‘악’의 심연에 가라앉아버린다. 역시나 그런 말루스의 곁을 지킨 자는 에스투스였다.
모든 걸 상실한 채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메말라가는 말루스를 바라보며 에스투스는 결심했다. 더는 말루스를 혼자 두지 않겠다고. 말루스를 ‘선의 세계’로 데려올 수 없다면, 선의 세계에 있는 ‘모두’를 ‘악의 세계’에 보내주겠노라고 말이다. 에스투스는 말루스와 나눴던 ‘악’에 대한 담론과 그의 ‘사고 체계’를 정립한 내용을 바탕으로 『악의 기쁨』을 출간했다. 그리고 ‘악’을 널리 퍼뜨리기 위해 끔찍한 짓을 벌이게 된다. 한번 퍼져나간 ‘악’은 화마가 되어 인탈리엔을 집어삼켰다. 모든 공동체가 문을 닫고 ‘우리’를 위하던 사람들이 ‘개인’의 ‘이기심’만을 좇자 말루스는 에스투스를 찾아간다. 말루스는 간절한 목소리로 에스투스에게 이제 그만 멈출 것을 부탁한다. 악의 세계로 모두를 데려간 에스투스는 모든 걸 체념한 듯 나지막이 고백했다. 여태껏 그가 ‘악의 사도’로 살아온 이유를, 그리하여 저지른 참담한 악행들을.

“이보게, 말루스. 웃어보게! 나는 인탈리엔 전체보다 자네 하나를 선택한 거야. 어째서 기뻐하지 않는 겐가?”






풀: 기억해야 할 일본군 '위안부'의 역사

김금숙 저 / 23,000원 / 창비

바람에 스러지고 밟혀도 다시 일어서는 풀처럼
전쟁의 폭력과 트라우마에 맞서 싸운 ‘위안부’ 피해자 이야기

* 한국 최초 ‘만화계의 아카데미상’ 하비상 수상작 *
* 35개국 번역 출간, 일본군 ‘위안부’ 이야기를 세계적으로 알린 작품 *
* 『뉴욕 타임스』 『가디언』 『워싱턴 포스트』가 주목한 만화가 김금숙의 대표작 *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옥선 할머니의 생애를 그린 만화. 국제만화계에서 최고의 권위를 가진 하비상을 한국 최초로 수상하고 아이즈너상 3개 부문에 후보로 지명되는 등 국제적으로 주목받으며 ‘위안부’의 실상을 세계에 알린 작품이다. 『풀』은 ‘위안부’ 피해자를 수동적으로 그리는 기존 시각을 넘어서 삶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가지고 전쟁을 반대하는 평화운동가이자 인권운동가로 살아가는 주체적이고 현재적인 존재로 그려낸다. 『뉴욕 타임스』 『가디언』 『워싱턴 포스트』 등 전 세계 유수의 매체에서 최고의 그래픽노블로 선정했고 미국 크라우제 에세이상, 빅아더북 최고의 그래픽노블상, 카투니스트 스튜디오 최우수출판만화상, 프랑스 휴머니티 만화상 심사위원 특별상, 스페인 안티파스상 최고의 국제만화 부문, 이탈리아 트레비소 만화 축제 최우수해외만화상 등을 수상했다.
본 개정판은 2017년 초판 출간 이후 절판된 작품을 다듬고 2024년에 부치는 「작가의 말」을 덧붙여 새로이 선보인다. 한국을 넘어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만화가로 자리잡은 김금숙은 『풀』 외에도 한국전쟁 이산가족, 조선 최초의 여성 볼셰비키의 삶, 발달장애 청년 등 다양한 개인의 이야기를 통해 시대의 보편성과 아픔을 담담하게 담아내는 작품을 그리고 있다. 

“전쟁은 인간을 인간이 아니게 만든다”
전 세계를 울린 ‘위안부’ 역사의 실상

김금숙 작가는 『풀』의 취재를 위해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모여 살고 있는 경기도 광주의 나눔의집을 찾아간다. 여러 차례의 방문 끝에 작가는 이옥선 할머니와 인연을 맺게 되고, 그와 인터뷰를 시작한다. 하지만 할머니는 “일본이 나빠. 아베가 사죄해야 해”라는 말만 반복하며 좀처럼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는다. 제자리를 맴도는 대화에 지쳐갈 즈음, 할머니는 가까스로 곡진한 인생사를 풀어놓는다.

이옥선 할머니는 부산 보수동에서 오남매의 맏딸로 태어났다. 배움에 대한 열의가 가득하던 옥선은 다른 아이들처럼 학교에 가는 것이 소원이었지만 입에 풀칠을 하기에도 바쁜 집에서는 공부를 시켜줄 여력이 없었고, 결국 입을 하나라도 덜기 위해 수양딸로 보내진다. 학교를 보내준다는 말에 집을 떠나 이 집 저 집을 전전하며 식모살이를 하던 어느 날, 열여섯살의 옥선은 주인집 심부름을 나섰다가 길거리에서 낯선 이들에게 붙잡혀 끌려간다. 그렇게 그는 ‘위안부’가 되었다.

옥선이 증언하는 ‘위안부’ 생활의 실태는 생생하고 잔혹하다. 하지만 할머니의 고통을 들추는 장면들은 직접적인 묘사 대신 수묵화처럼 짙은 먹을 사용해 나무나 바람 같은 이미지로 그려진다. 김금숙 작가는 폭력의 실상을 그 자체로 재현하는 것이 도리어 피해자들에게 다시금 고통을 가하는 일일 수 있으며, 독자들에게도 도리어 그 잔혹성이나 비인간성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길이라 생각한다. “그 어떤 만화보다도 심장을 멈추게 하는 장면들”(『뉴욕 타임스』)이라는 서평처럼 『풀』의 강렬한 그림은 ‘위안부’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않으면서도 독자들에게 그 역사의 잔혹성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일본이 왜 사과해야 하는지 묻는 이들을 향한 외침
피해자가 세상을 떠나도 역사는 없어지지 않는다

『풀』은 35개국에 수출되며 일본군 ‘위안부’ 역사의 실상을 전 세계에 알렸다. 일본에서는 2020년 시민활동가의 주도로 일본어판이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성공적으로 출간되며 시민사회 차원에서의 연대와 한일관계의 장래를 밝히기도 했다. 『풀』의 이런 넓은 소구력은 ‘위안부’ 문제가 한일 양국의 문제를 넘어서 더 넓은 차원의 여성문제이자 인권문제이기도 하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김금숙 작가는 개정판에 부치는 「작가의 말」에서 “나와 다른 피부색을 가진, 내가 알지 못하는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이, 그것도 젊은 여성들이 눈물을 흘리며 나에게 고맙다고 할 줄 몰랐다”며 “성폭력은 시대와 연령, 인종, 사회적 계급을 넘어 피해자에게 큰 상처를 남기는 끔찍한 일”이라고 말한다.

『풀』의 마지막 장면에는 2015년 12월 피해자를 배제한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에 이옥선 할머니가 분노하며 끝까지 싸울 것을 다짐하는 장면이 담겨 있다. 개정판이 출간된 2024년, 그는 아흔일곱의 나이로 여전히 나눔의집을 굳건히 지키고 있다. 투석을 받는 등 좋지 않은 건강 상태에도 “우리는 사죄하기 전에는 죽지 않는다”며 관련 행사에 활발히 참여해 목소리를 내고 있다. 밟혀도 다시 일어서는 풀처럼, 전쟁범죄의 피해를 딛고 역사의 증인으로 거듭난 동아시아 여성들의 목소리는 독자에게 큰 울림을 준다.

작가의 말

『풀』이 전세계 35개 언어로 번역되고 국제적으로 많은 상을 수상하고 여러 나라에서 추천도서로 선정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대한민국에서 30시간 이상 비행기를 타고 가야 하는 지구 반대편, 중남미에서 그렇게 큰 울림을 줄 것이라고는 진심으로 예상하지 못했다. 나와 다른 피부색을 가진, 내가 알지 못하는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이, 그것도 젊은 여성들이 눈물을 흘리며 나에게 고맙다고 할 줄 몰랐다. “이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입니다”라는 그들의 말에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풀』을 사랑해준 수많은 독자들은 내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크게 『풀』에 공감하고 나보다 더 깊이 나의 의도를 이해했다. 침묵처럼 그림도 글이라, 그림만 있는 페이지에서 독자들은 그림을 마음으로 읽었다. 그들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그 눈 속의 반짝이는 별은 내가 작품을 계속하는 데 길이 되어줄 것을 확신한다. 나는 만화로 삶에 대해 기록하는 것을 숙명처럼 계속하리라. 세월이 지날수록 인간과 모든 생명체에 대한 소중함과 사랑이 기본이 되는 작품을 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미드나잇 레드카펫

김청귤 저 / 16,800원 / 네오북스(네오픽션)


눈부신 그녀들의 세계로 초대하는 김청귤 작가의 첫 번째 단편소설집!

이 세상이 소녀를, 언니를, 나의 여왕을 괴롭힌다면
우리는 더 지독하고 명랑하게 투쟁하리라!


인간이되 인간이지 않은 존재의 모순

김청귤 작가의 두 번째 소설집 『미드나잇 레드카펫』은 이 시대에 아포芽胞처럼 퍼져버린 수많은 사회문제를 작가만의 독특한 판타지세계와 첨예한 시선으로 담아냈다. 우리와 밀접하게 닿아 있는 디스토피아를 매우 현실적이면서도 몽환적인, 비현실의 감각으로 풀어낸 것이다. 이 책은 계속해서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는 ‘성별에 대한 차별적 인식’과 ‘세대를 거듭하는 고질적인 선호사상’, ‘비일비재한 폭력’ 등을 가감 없이 다룬다. 「한밤의 유혈 사태」는 살인이나 스토킹 같은 경범죄를 저지른 가해자가 ‘심신미약’을 일종의 면죄부처럼 사용하는 황당한 현상을 비판한다. 직접적으로 드러난 피해가 없다는 이유로 가해자에 대한 처벌을 내리지 않으면서, 우연한 사고로 용의자가 된 주인공 ‘나’에게는 희롱적인 말을 서슴없이 내뱉고 자신을 변호할 수 있는 발언권을 강제로 묵인한다. 이런 강압적인 수사 속에서 주인공이 ‘생리’는 어째서 ‘심신미약’의 이유가 되지 않느냐고 되묻는 대목은 특히 인상적이며, 그렇기에 이 작품은 현 시대를 적나라하게 표상한다고 볼 수 있다.
유사한 맥락으로 ‘피해자’가 분명 존재함에도 ‘가해자’에게 솜방망이 처벌이 내려지는 문제는 「서대전네거리역 미세먼지 청정 구역」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인간이 ‘미세먼지 인간’으로 변이하게 되었다는 판타지적 설정이 더해진 이 작품에서는 미세먼지 ‘괴물’이 미세먼지 ‘히어로’가 되는 일련의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성별로 우위를 가르고 권력과 지위에 따라 범죄 사실이 미화되는 불편한 현실을 보여준다.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퇴근하던 ‘도연’은 학교 선배이자 같이 일하는 ‘기혁’에게 위협을 당한다. ‘도연’에게 이성적인 호감이 있다는 이유로 집착하듯 연락을 하고, 제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길거리에서 손목을 잡아채고 욕설을 퍼붓는 등 폭력적인 행동을 가한다. ‘도연’의 도와달라는 외침을 들은 ‘다정’의 도움으로 상황은 일단락되지만, 다음 날 ‘기혁’은 술에 잔뜩 취한 채 카페에 찾아와 또다시 ‘도연’에게 난동을 부린다. 그러나 ‘기혁’이 경찰서에 연행된 이유는 ‘도연’에게 저지른 폭력 때문이 아닌, 카페 기물을 파손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어쨌거나 처벌을 받게 되어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혼란스러운 그때, 저 멀리서 들려온 소란에 ‘도연’은 다시 한번 참담해진다. ‘기혁’이 미세먼지 인간으로 변이해 경찰서 일대가 청정 구역이 된 것이다. 그렇게 ‘기혁’은 ‘가해자’에서 순식간에 미세먼지 ‘히어로’가 되었고, 사람들은 그가 경찰서에 있던 이유를 알면서도 그 사실을 모른 체한다. 작품에서 미세먼지 인간을 묘사한 “인간이되 인간이지 않은”이라는 수식은 온몸이 미세먼지로 바뀌어 이 세상의 이방인이 된 미세먼지 인간을 그대로 서술하는 동시에, 차마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인간이면서도 인간이지 못한’ 자들을 꼬집기도 한다.
위의 두 작품은 ‘어떤 사건으로 인해 누군가가 경찰 조사를 받게 된다’는 플롯을 공통적으로 갖는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한밤의 유혈 사태」에서는 ‘용의자’가 조사를 받는다는 것과 「서대전네거리역 미세먼지 청정 구역」에서는 ‘피해자’가 조사를 받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김청귤 작가는 가해자인 ‘기혁’의 조사 장면이 아닌 피해자 ‘도연’의 조사 장면을 앞세워 보여준다. 우리는 이 ‘장치’에 숨겨진 본질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바로 두 작품의 조사 장면의 분위기나 경찰의 언행, 사건의 결말이 매우 흡사하다는 것이다. 어째서 용의자와 피해자의 조사 장면이 비슷하게 느껴질 수 있는가? 만약, ‘기혁’이 조사받는 장면이 「한밤의 유혈 사태」와 대응했다면? 우리는 분명한 차이점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세상은 여전히 “인간이되 인간이지 않은” 존재들에 둘러싸여 있고, 우리는 너무 쉽게 그들에 노출된다. 그렇기에 김청귤 작가는 우리가 끊임없이 그들에 맞설 수 있도록, 아포에 감염되지 않도록 이 책을 통해 외치는 것이다.

우리의 연대는 가장 아름답고 우아한 투쟁이다

『미드나잇 레드카펫』에 수록된 여섯 작품은 모두 ‘여성’ 인물을 중심으로 서사를 이끌어간다. 「마법소녀, 투쟁!」에서 마법소녀들은 목숨을 걸고 괴물에 맞서 싸우지만, 시민들은 마법소녀들의 희생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히어로’라면 응당 희생이 따르는 것 아니겠느냐고 묻는다면, 이미 우리가 목격해온 많은 ‘히어로’들이 있기에 수긍할 수 있겠다. 그러나 마법소녀들에게 짧은 치마나 딱 붙는 유니폼을 입히고, 괴물이 공격하는 긴박한 상황에서조차 아름답거나 예쁜 장면을 기대하는 대목에서는 이 또한 히어로가 마땅히 감내해야 하는지 반문하게 된다. 특히 마법소녀에서 은퇴하면 또 다른 마법소녀를 낳기 위해 결혼을 해야만 한다는 그들의 삶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부당한 역할과 책임을 강요당하는 우리 현실과 직결된다. 이러한 ‘고정관념’에 대한 비판적 시각은 「찌찌레이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어느 근미래, 여성들은 순수 혈통의 인간을 낳고 영양소가 풍부한 모유를 공급해야 한다는 이유로 ‘인공 가슴 이식수술’을 받는다. 소설 속 남성들은 더 건강한 몸을 위해 인공 장기나 신체로 교체하면서도, 여성은 ‘임신’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며 제대로 된 약조차 처방해주지 않는다. ‘임신’이 하나의 성에 국한된 필수적 책임인 듯 강요되는 이 불편한 설정이 성별에 따른 차별적 역할 부여가 여전히 만연한 우리 사회를 연상케 한다는 사실이 꽤나 안타깝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겪어야 하는 수난은 「이달의 네일」과 「앨리스 인 원더랜드」에서도 이어진다. 하루아침에 미세먼지 인간으로 변한 「이달의 네일」의 ‘하늘’은 몸이 바스라지고 방 안이 먼지로 가득해지는 순간을 맞닥뜨린다. 그러나 ‘하늘’은 옆에서 자고 있는 ‘언니’를 깨울 수도, ‘미세먼지 인간’ 변이자를 찾는다며 아파트를 휘젓고 다니는 경찰 앞에 나설 수도 없다. ‘하늘’이 어떤 선택을 하든, ‘언니’와 동성 연인이라는 사실이 알려져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사회가 규정한 ‘평범’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하늘’은 ‘소수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앨리스 인 원더랜드」는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등장하는 ‘여왕’과 ‘하트 잭’ ‘앨리스’ ‘체셔’ 등의 익숙한 캐릭터를 불러내 새로운 이야기를 전한다. 동화에서는 남의 목숨을 가벼이 여기는 ‘여왕’의 잔인하고 악랄한 모습이 주를 이루었다면, 김청귤의 소설에서는 ‘여왕’임에도 불구하고 ‘여’왕이라는 이유로 차별받는 사회의 모순을 다룬다. 나아가 능동적으로 삶의 주체가 되기를 선택한 ‘앨리스’가 ‘여왕’의 ‘주체성’ 역시 되찾기 위해 노력하며 성장해가는 과정은 여성들의 ‘아름답고 우아한’ 투쟁의 길을 보여준다. 반면, 작가는 또 다른 ‘여성’ 인물들을 통해 다양한 인간 군상을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으로서, 개인으로서, 그리고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를 담아냈다.






고양이가 보았어
돌로레스 히친스 저 / 조이스 캐럴 오츠 해제, 허선영 역 / 17,500원 / 위즈덤하우스


1939년 출간된 ‘고양이 미스터리’의 원형!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하는 돌로레스 히친스 고전 추리소설
조이스 캐럴 오츠 〈소개말〉 수록
‘고양이 미스터리’의 원형과도 같은 고전 추리소설, 돌로레스 히친스의 《고양이가 보았어》가 위즈덤하우스에서 출간되었다. 돌로레스 히친스는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영미권 작가로 애거사 크리스티, 엘러리 퀸 등으로 대표되는 미스터리 소설의 황금기에 주요하게 활동했다. 《고양이가 보았어》는 필명 ‘D. B. 올슨’이란 이름 아래 1939년 초판 출간되어 현재까지 꾸준히 판매되고 있는 히친스의 대표적인 미스터리 작품으로, 현재까지 두터운 팬층을 보유한 ‘고양이 미스터리’의 초기작으로 손꼽힌다. 이 책은 고전 미스터리 소설을 즐겨 읽는 국내 독자들에게 할머니 탐정과 그의 반려묘가 함께하는 잘 만들어진 추리소설로서의 충분한 재미를 제공할 것이다.
일흔의 독신 할머니 ‘레이철’은 이른 아침 조카 ‘릴리’의 전화를 받고, 릴리가 머무는 해변가 집으로 향한다. 레이철과 언제나 함께하는 검은 고양이 ‘서맨사’를 바구니에 담고서. 하지만 간절히 도움을 요청했던 릴리가 왜인지 사정을 털어놓지 않고……, 일을 나가지 않는 어딘지 수상한 이웃들과 낡고 녹슨 집 때문에 레이철은 불안해져간다. 그리고 얼마 후, 릴리가 흉기에 살해된 채 발견되고, 레이철은 조카를 살인한 범인을 잡기 위해 스스로 탐정이 되기로 결심한다. 고령의 나이에도 총명하고 예리한 지성을 간직한 레이철은 그의 사랑스러운 고양이 서맨사와 함께 끔찍한 살인 사건을 해결하며 ‘미스 마플’에 견줄 만한 또 하나의 할머니 탐정으로서 독자들을 매혹할 것이다.

1939년 출간된 ‘고양이 미스터리’의 원형!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하는 돌로레스 히친스 고전 추리소설
조이스 캐럴 오츠 〈소개말〉 수록

“레이철 머독을 알게 된 걸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_ ≪뉴욕타임스≫


‘고양이 미스터리’의 원형과도 같은 고전 추리소설, 돌로레스 히친스의 《고양이가 보았어》가 위즈덤하우스에서 출간되었다. 《고양이가 보았어》는 필명 ‘D. B. 올슨’이란 이름 아래 1939년 초판 출간된 히친스의 대표적인 미스터리 소설이다. 돌로레스 히친스는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영미권 작가로 애거사 크리스티, 엘러리 퀸 등으로 대표되는 미스터리 소설의 황금기에 주요하게 활동했다. 특히 그의 대표작 《Fool’s Gold》는 장뤼크 고다르 감독의 영화 〈국외자들〉의 원작 소설로 잘 알려져 있다.
《고양이가 보았어》는 2021년에 이르러 유명한 미스터리 소설 편집자이자 맨해튼에 위치한 서점 ‘미스터리어스 북 숍’ 전 대표였던 오토 펜즐러가 기획한 ‘아메리칸 미스터리 클래식스’ 시리즈 중 한 권으로 소개되어, 현재까지 꾸준히 판매를 이어가고 있다. 시리즈의 이름에서도 짐작할 수 있는바, 이 책은 단지 오래전 출간된 소설이라는 것을 넘어 하나의 클래식으로서 장르적 맥락에서 그 역사적 가치를 충분히 입증해왔다. 특히 현재까지 두터운 팬층을 보유한 ‘고양이 미스터리’의 계보를 따라 올라갔을 때 놓일 수 있는 초기작으로서의 의미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고양이가 보았어》는 고전 미스터리 소설을 즐겨 읽는 국내 독자들에게 할머니 탐정과 그의 반려묘가 함께하는 잘 만들어진 추리소설의 충분한 재미를 제공할 것이다.

약에 취한 레이철과 끔찍하게 살해당한 조카…….
검은 고양이만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일흔의 나이에 이른 ‘레이철 머독’과 여동생인 ‘제니퍼’는 일상의 지루함에 대한 얘기로 아침을 보내는 중이다. 하지만 이들의 단조로운 아침은 두 사람에겐 너무나 큰 데다가 서늘하기까지 한 저택을 요란하게 울리는 전화 한 통 때문에 단번에 깨지고야 만다. 통화의 발신인은 그들의 조카 ‘릴리’로, 릴리는 어딘지 매우 불안한 기색으로 자신이 머물고 있는 곳으로 와달라고 요청한다. 조카에 대한 염려는 물론이거니와 평소 미스터리 영화를 즐겨보는 레이철에게는 평화로운 하루를 깨뜨리는 사건은 놓칠 수 없는 기회이기에, 레이철은 짐을 챙겨 서둘러 릴리가 머무는 해변으로 향한다. 어디든 레이철과 함께하는 검은 고양이 ‘서맨사’와 함께 살인 사건이 기다리는 곳으로 말이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전차로 한 시간 거리에 위치한 브레이커스 해변의 낡은 집, 서프 하우스. 해변으로의 짧은 나들이라 생각했던 레이철은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듯한 릴리의 수상한 태도와 바닷바람에 녹슬고 색 바랜 집, 수상하기 짝이 없는 이웃들까지 마주하자 불안감에 휩싸인다. 게다가 레이철의 큰언니 ‘애거사’의 유산을 물려받은 고양이 서맨사에게 자꾸만 불길한 사건이 생기는 탓에 레이철은 간곡히 릴리에게 이 집을 함께 떠날 것을 애원한다. 그리고 며칠 뒤, 누군가 타놓은 약물을 마시고 레이철이 의식을 잃은 사이, 릴리가 흉기에 무참히 살해당한 채 발견된다. 유일한 목격자는 검은 고양이 서맨사뿐. 레이철은 자신의 조카를 죽인 범인을 찾기 위해 형사 메이휴 경위와 함께 사건 해결에 뛰어든다.

사뿐히 옮겨 가는 고양이의 발끝에 놓인 살인 사건의 진실

‘고양이 미스터리’는 코지 미스터리를 즐기는 독자들이 찾아 읽는 하나의 갈래다. 애묘인의 관심을 끄는 소재인 것은 물론, 추리소설과 잘 어울리는 고양이의 습성 때문에 ‘고양이 미스터리’는 장르 내에서도 독특한 위치를 점유하며 많은 미스터리 팬의 마음을 사로잡아왔다. 특히 이 책의 〈소개말〉을 쓴 조이스 캐럴 오츠는 “현재 1년에 수백만 달러를 벌어들이는” 고양이 미스터리라는 “기이한 출판 현상의 포문”(340쪽)을 연 작품으로서 《고양이가 보았어》의 문학사적 의미를 강조했다.
독자는 레이철과 함께 범인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아마추어 탐정 레이철과 경위 메이휴의 시선을 따라가게 되겠지만, 작가는 중간중간 독자들의 시선을 고양이 ‘서맨사’에게로 돌린다. 검은 비단 같은 털에 황금빛 눈을 간직한 ‘서맨사’는 단순히 레이철의 반려동물이나 배경의 한 요소에 그치지 않고, 사건과 관계된 중요한 단서를 쥐고 있는 것으로 그려진다. 특히 큰 재산을 상속받은 고양이라는 설정은 사건의 전후 관계와 동기를 풀어가는 데에 고려해야 할 단서로 언급되면서 신선한 재미를 더한다. 부드럽고 친절하지만 낯선 이에겐 사납기 그지없는 고양이 서맨사의 걸음을 쫓다 보면 이 흉악한 살인 사건의 추악한 경위를 밝힐 수 있을 것이다.

대범하고 총명한 할머니 탐정, ‘레이철 머독'의 발견

우아한 매력을 고스란히 간직한 레이철은 모두가 인정할 만한 미스터리 영화 팬에서 조카의 살해를 계기로 스스로 아마추어 탐정으로 활약하게 된다. 고령의 나이에도 삼십대 형사를 압도하는 총명함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대담함, 그리고 때로는 다락방을 오르내릴 정도의 신체적 건강을 뽐내며, 애거사 크리스티의 유명한 캐릭터 ‘미스 마플’에 견줄 만한 또 한 명의 할머니 탐정으로서 독자들을 매료할 것이다.
특히 끊임없이 남자와 연애하기를 즐기지만 대체로 형편없는 연애만을 경험해온 릴리와 달리 독신으로서의 넘치는 자부심과 누구에게도 의존치 않는 레이철의 독립적인 태도는 사건 수사에서도 빛을 발한다. 형사 메이휴와 의견이 다를 땐 스스로의 논리를 입증하기 위해 목숨을 건 조사에 뛰어들거나, “죽음의 차가운 손아귀에 거의 사로잡힐 뻔했”던 순간에도 “범죄라는 퍼즐에 흠뻑 빠져”(8쪽) 때론 거짓말로 주변 인물들에게 정보를 빼내기도 하는 것이다. 가장 유력한 용의자 앞에서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레이철의 캐릭터는 믿음직한 탐정으로서 그 역할을 충실히 해낸다. “레이철은 전문적인 형사보다 한 수 위인 매혹적인 아마추어 탐정으로서의 역량을”(341쪽) 입증할 것이며, 그의 사랑스러운 동료 ‘서맨사’와 함께 코지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독자들에게 장르의 지평을 넓히는 즐거움을 선사할 것이다.








봄빛 (리마스터판)
정지아 저 / 16,800원 / 창비


“내 새끼, 그래 한시상 재미났는가?”
경탄과 환희를 부르는 짜릿하고도 극적인 순간

오래도록 기억될 정지아 문학의 거대한 뿌리
저마다의 그리움을 되살려내는 묵직한 이야기의 힘
대형 베스트셀러의 입지를 확고히 할 만큼 폭발적인 독자의 호응을 얻음과 동시에 문화 각계의 호평을 얻은 『아버지의 해방일지』의 작가 정지아의 초기작 『봄빛』이 창비 리마스터 소설선으로 새롭게 출간되었다. 작가 스스로 밝히듯 『봄빛』 곳곳에는 『아버지의 해방일지』의 중요한 요소를 이루는 씨앗이 던져져 있다(「새로 쓴 작가의 말」). 어떤 대목은 『아버지의 해방일지』 속 등장인물의 감춰진 에피소드로 읽히고, 어떤 대목은 새로운 관점에서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더 깊이 이해시켜주기도 한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사랑하는 독자라면 『봄빛』을 반드시 읽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물론 『봄빛』은 그 자체로 눈부시게 아름다운 빛을 발하는 소설집이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봄빛」을 읽고 정지아에 대한 확신과도 같은 신뢰를 갖게 됐다. (…) 세간의 잔재주들이 결코 범접할 수 없는 기품에 도달”(『느낌의 공동체』, 문학동네 2011, 298면)해 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만큼 이 소설집은 잘 짜인 서사가 선사하는 묵직한 문학적 울림으로 가득하며, 한편 한편에서 짜릿하고도 극적인 순간을 경험할 수 있다. 특히나 이 소설집이 천착하는 주제인 ‘잃어버린 기억’ ‘가족의 의미’ ‘현대사를 바라보는 관점’ 등은 여전히 유의미할뿐더러, 어떤 면에서는 소설집이 처음 발표될 당시(2008)보다 더욱 중요해졌다. 새롭게 선보이는 『봄빛』의 이야기가 여전히 감동적인 동시에 재미있는 것도 아마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 창비에서는 독자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는 작품들을 엄선해 새로이 단장한 ‘리마스터판’을 출간하고 있습니다. 한국문학의 새로운 고전으로 자리 잡은 작품들이 오늘의 독자들에게 한층 가까이 다가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잃어버린 기억과 과거
삶을 복원해내는 서사의 힘


차안(此岸)과 피안(彼岸)을 포용하며 웅숭깊은 세계를 지향했다”라는 평가를 받으며 2006년 이효석문학상을 수상한 「풍경」의 주인공은 평생 홀로 노모를 모시고 사는 예순의 노인이다. “해가 뜨면 새로 주어진 하루를 살아내듯” 육십년을 살았다. “어머니였고 세상이었으며 유일한 동무”(93면)였던 어머니는 벌써 삼십년 전부터 기억을 잃기 시작해 막내아들인 자신을 여수 14연대를 따라 떠난 형들로 착각한다. 집 떠난 자식들을 기다리던 습관을 버리지 못한 어머니는 집을 찾는 누구라도 자식인 듯 대한다. 어머니에게 잃어버린 기억이란 평생 동안 기다린 자식들이기도 하고 한 많고 곡절 많은 자신의 젊음이자 한평생이기도 하다. 이야기의 마지막에 펼쳐지는 어머니와 아들의 대화는 환상적임과 동시에 뭉클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못」의 주인공 건우씨는 여든을 넘긴 작은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성치 못한 몸을 갖고 있고 매년 봄 자운영이 필 무렵 찾아오는 시집간 누이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신세이다. 작은어머니는 평생 조카 뒷바라지에 고생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고 건우씨가 차곡차곡 모은 돈을 호시탐탐 노리지만 건우씨는 그 돈이나마 꼭 간직하고 있으라는 누이의 말을 되새기며 작은어머니와 티격태격한다. 봄이 와도 집에 오지 않는 누이를 원망하는 건우씨와, 그런 건우씨를 애처롭게 바라보는 작은어머니는 함께 늙어가는 서로의 처지를 안쓰러워하며 연민의 감정을 품는다. 아릿한 마음과 동시에 펼쳐지는 시트콤과 같은 상황극들이 웃음을 자아내는 작품이다.
표제작 「봄빛」에서는 젊은 시절 서슬이 퍼렇던 아버지가 치매에 걸린 듯하다는 어머니의 걱정스러운 전화에 아들이 시골을 찾는다. 밥상머리에서 ‘뚜부’(두부) 반찬을 내놓으라고 막무가내 호통을 치는 아버지와 평생 큰소리 한번 못 냈지만 남편의 보살핌 속에 살아온 어머니의 변한 모습을 보고 아들은 두려울 만큼 가슴이 먹먹해진다. 다음 날 검사 결과를 위해 찾아간 병원에서 뇌에 문제가 있다며 아버지는 치매 초기 진단을 받는다. 돌아오는 길에 노부모가 나란히 자동차 뒷자리에서 잠든 모습을 보며 아들은 그동안 부모에게 받은 것을 돌려줘야 할 때가 돌아왔음을 깨닫는다. 이 작품에서 잃어버린 기억은 자식들을 키우고 평생을 살아내야 했던 아버지의 역사이다. 「봄빛」이 주는 큰 감동을 문학평론가 정홍수는 생생한 사투리 생활어 표현에서 비롯된다고 본다(추천사). “‘뚜부’가 올라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아버지와 어머니가 벌이는 서글픈 설전은 오랫동안 기억될 명장면”(신형철, 『느낌의 공동체』 298면)이다.
「세월」에 이르러서는 치매와 노화가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 우리 역사의 질곡으로까지 맞물려 확장된다. 빨치산이던 남편을 따라 산에 오르고, 첫아이를 눈물로 보내고, 평생 남편을 하늘같이 믿고 따라온 아낙이 기억을 잃은 남편 옆에서 그동안 말하지 못한 속내를 넋두리로 늘어놓는다. 이 대목에서 「세월」의 화자는 『아버지의 해방일지』의 ‘어머니’이고 ‘이녁’은 ‘아버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녁이 화자에게 글공부를 시켜준 에피소드나, 옥살이를 한 이야기는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읽은 사람에게는 새로운 재미로 다가온다. 이 작품에서 남편이 잃어버린 기억을 복원하고 되새기는 일이란 곧 역사의 복원이고 증언이 된다. 작품 전체에 걸쳐 넋두리를 읊는 아낙은 시종 진한 남도 사투리를 구사하여 살아 있는 입말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게 한다.



섬세하게 포착한 인간의 내면
정지아가 그려낸 다양한 마음의 형태


한 많은 평생의 기억을 잃고 자신의 존재조차 잊는 노년의 애틋한 정서를 섬세하게 그려낸 작품 외에도, 『봄빛』에는 복잡하고 미묘한 인생과 인연의 여러 국면을 다채롭게 그려낸 작품들로 읽는 재미가 풍성하다.
어린 시절부터 어둡기만 한 가족사의 운명을 온몸으로 겪었기에 운명처럼 반복되는 인연을 거부하고자 하지만 끝내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이야기를 그린 「운명」의 ‘나’는 운명 앞에서 “어디 한번 덤벼봐라, 얼마든지 상대해주마,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 할지라도 고분고분 져주지는 않겠다”(223면)라며 결사항전의 의지를 보인다. 대학시절 우연한 만남을 거듭한 K는 ‘나’가 운명의 여자라고 생각하고 다가오지만 ‘나’는 비극적인 운명의 과거로 인해 마음을 열지 못한 채 떠난다. 치근덕대며 접근하는 직장 상사를 피해 떠난 부산행 여행길에서 ‘나’는 운명이라 믿었던 것들의 무상함과 삶뿐 아니라 죽음조차 운명이라는 생각에 잠긴다.
「양갱」의 주인공은 남편과 헤어지고 홀로 살고 있다. 어느 날 불쑥 찾아온 고모가 반갑지 않지만, 고모는 어린 시절부터 자기 자식들 못지않게 각별히 조카를 챙기던 분이었기에 마냥 야박하게 굴 수도 없다. 불쑥 찾아온 조카집에서 자기 집인 양 천연덕스럽게 구는 고모는 주인공이 어렸을 적부터 좋아하는 양갱을 만들어주며 가슴에 응어리진 남편과의 이별과 상처를 따뜻하게 어루만져준다.
그리고 연작 「길 1」과 「길 2」에서는 우연히 산행길에서 만난 한날한시에 태어난 동명이인인 주인공 ‘김기영’을 중심으로 길을 떠난 자와 남아 있는 자의 입장을 엇갈리게 그려냈다. 피란길에 엄마를 잃고 동생들조차 제대로 챙기지 못한 죄책감에 시달리던 「길 1」의 주인공 김기영은 양아버지의 보살핌을 받아 의대를 졸업하고 제법 성공한 길을 걷지만 동생들을 지켜내지 못한 어린 시절의 자신을 탓하며 가족을 떠나 정처없이 걷는 길 위의 삶을 택한다. 「길 2」의 주인공 김기영은 어린 시절 가족을 버리고 떠난 아버지를 그리워하면 타지로 떠나는 동네사람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고향마을을 지키며 살아온 인물이다. 공부를 제대로 시키지 못한 큰딸에 대한 부채의식을 지고 사는 김기영은 친정집에 다니러 오는 큰딸을 위해 산으로 더덕을 캐러 들어갔다가 산길을 헤치고 오는 또다른 김기영을 만난다. 길을 떠나온 자와, 남아서 길을 지키는 자의 조우는 인연과 이별이라는 인생의 풀 수 없는 수수께끼를 실감케 한다.
그밖에 남편과 가족을 떠나 감행한 영국 여행에서 우연히 만난 스무살 차이나는 영인을 통해 마흔셋 여자로서의 자신을 재발견하는 「스물셋, 마흔셋」은 시종 유쾌한 필치로 그려지지만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작가의 “여성성 탐구가 어떤 차원으로 옮아가고 있는지를 암시적으로 보여주는”(해설, 김경수) 작품이다. 여성으로서 자신을 한번도 돌본 적도 사랑한 적도 없음을 자각한 화자의 반성은, 이윽고 독자에게로 옮아가 스스로를 돌본다는 것의 의미를 되묻게 한다.

가벼운 이야기가 넘쳐나는 시기에 『봄빛』의 묵직함은 오히려 신선한 문학적 감동으로 다가온다. 『봄빛』이 지닌 향토성은 시간이 지나도 촌스러워지지 않는 고궁과 같은 매력을 뿜어내며, 보편적인 감수성을 자극해 저마다의 그리움을 되살려낸다.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은 움직이게 된다. 문득 부모님의 안부를 묻게 되고, 그리운 사람에게 연락을 하게 된다. 혹은 자기를 위해 하루쯤 근사한 ‘호캉스’를 계획하게 될지도 모른다. 『봄빛』에는 언젠가 사라질 것들을 살펴보고 아껴주게 하는 힘이 있다. 그것이 바로 좋은 이야기가 주는 힘일 것이다.








고잉 홈
문지혁 저 / 17,000원 / 문학과지성사

“나는 가로세로 반듯한 길에서조차
길을 잃어버리는 사람이로구나”
헤매고 방황하는 미로 속에서
기록하고 기억하며 길을 찾아가는 이들의
느리지만 반짝이는 여정

내 지난 여정의 비밀한 목적지는 결국 ‘고잉 홈’이었던 셈이다.
-‘작가의 말’에서

2010년 단편소설 「체이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후 두 권의 소설집과 다섯 권의 장편소설 그리고 번역서까지 꾸준히 출간하며 활발한 활동을 이어오고 있는 작가 문지혁의 세번째 소설집 『고잉 홈』이 문학과지성사의 2024년 첫 소설집으로 출간되었다.
‘작가의 말’에서 밝히고 있듯이 2022년 두번째 소설집 『우리가 다리를 건널 때』(다산책방)가 첫 소설집 출간 이후 11년 만에 나온 것과 달리 2022년에서 2023년 2년 사이 집중적으로 씌어진 소설들로 묶인 이번 소설집은, 각각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매력을 넘어서 아홉 편의 작품이 어우러져 그 안에 새롭게 만들어낸 또 다른 길을 만나는 특별함이 있다.


뉴욕에서 유학 생활을 한 작가의 경험은 그간 발표한 다양한 작품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이제는 문지혁 작가 고유의 스타일로 자리를 잡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소설이 많은 부분 ‘자전적 소설’이나 ‘이민자 소설’로 불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번 소설집에 실린 아홉 편의 소설 역시 미국에 터를 잡고 사는 한국인 이민자나 유학생 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작품 속 공간은 이국의 ‘그곳’이고, 이야기 속 인문들은 이곳의 나와는 동떨어진 이방인의 아픔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 편 한 편 따라 읽어가는 동안 ‘그곳’이 내가 놓인 현실의 ‘이곳’과 다르지 않고, ‘이방인’의 아픔 또한 내가 겪는 일상의 불안과 슬픔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각각의 작품이 읽는 이의 삶에 퍼즐 조각처럼 끼워 맞춰지면서 만들어내는 특별한 길이다.
작가는 퍼즐이 완성되는 그곳에 빛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지 모른다. 이 책의 제목을 ‘뜰 안의 볕’으로 염두에 두었던 이유를 생각해보면 말이다. “무의미로 가득 찬, 무엇도 알 수 없고 누구도 볼 수 없는 이 칠흑 같은 우주에 보내는 고결한 모스부호”가 사람들 사이에서 반짝이기를 바랐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나 결국 이 책의 제목은 ‘고잉 홈’이 되었고, 그러자 작가는 자신의 “지난 여정의 비밀한 목적지는 결국 ‘고잉 홈’이었던 셈이”라고 고백한다. 이 책에 실린 소설들 “모두가 집에 가는, 집에 가고 싶은, 집에 가려고 하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렇게 각각의 작품 속에서, 집으로 향하는 길과 그 길에 선 이들의 마음 모두가 반짝인다. “내가 떠나왔고, 그래서 반드시 돌아가야 할 곳.” “내 나라. 내 고향. 내 본향” ‘홈’은 비단 물리적 공간만이 아닐 것이다. 나의 오랜 불안과 방황을 내려놓을 수 있는 정착지. 그러니 그 과정이 조금 느리고 힘들지라도 어찌 빛나지 않을 수 있을까. 물론 읽는 이가 그 여정에 기꺼이 마음으로 함께한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그것은 소설과 삶이 만나며 빚어내는 빛일 테니 말이다.

“살아 있는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닌, 공중에 있는 것도 아니고 땅에 있는 것도 아닌, 미국도 아니고 한국도 아닌 이 시공간”─피폐한 세계의 속, 집을 찾아가는 사람들

『고잉 홈』의 처음에서 독자가 맞닥뜨리는 공간은 공항이다. 뉴욕발 한국행 비행기를 기다리는 부부. 소설집은 한국으로 향하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에어 메이드 바이오그래피」는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 한국으로 가는 아내와 동행하며 비행기 안에서 장인의 전기를 써내려가는 미국인 사위의 기록이다. 미국 이민 1세대인 이호철의 파란만장한 미국 정착기는 한국 이민자의 전형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는 아내의 죽음 이후,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아무런 연결 고리도 없는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택한다. 결국 그곳에서 병을 얻어 죽음을 앞두고 있는 그는 바이오그래피마저 ‘홈’이 아닌 ‘에어’에서 씌어진다. 그는 홈을 찾아 한국에 간 것이 맞을까? 한국은 그의 홈이었을까? 그렇다면 호철의 딸에게 홈은 어디일까? 이런 물음을 안고 한발 더 내디디면 표제작 「고잉 홈」이 기다리고 있다. 이 작품의 제목에서 가리키는 ‘홈’은 뉴욕이다. 시카고에서 뉴욕까지 가는 차편을 제공하고 거기에 사례금 5백 달러까지 지급한다는 공고에 주인공 현은 고민할 필요도 없이 AI 소설 실험에 참가한다. 차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질문에 답을 하고 그것이 가공되어 AI가 쓰는 소설에 활용되는 이 실험에서 현은 자신의 가족과 꿈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그 이야기들은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현의 가지고 있던 종이로 접은 유니콘처럼 세상에 없는 것이지만, 그가 살고 싶어 하는 삶이라는 점에서 진실을 담고 있기도 하다. 그러니 그것을 가짜라 할 수 있을까? 그가 즉석에서 만들어낸 그 소설을 완전한 허구라 할 수 있을까? 우리가 닿고자 하는 ‘홈’으로 가는 길 위에서 삶의 진실을 담은 허구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일. 어쩌면 그것이 작가의 일은 아닌지 생각해보게 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어쩌면 문지혁의 이번 소설집 제목이 ‘고잉 홈’인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은 아닐지.
그렇다면 그들은 왜 ‘홈’을 떠나야만 했을까. 그 다양한 사정이 이어지는 소설에서 펼쳐진다. 「핑크 팰리스 러브」는 결혼 1주년을 맞은 유학생 부부가 휴가를 떠난 오래된 호텔에서 과거의 연인을 만나는 ‘잔혹한 판타지’다. 이 이야기가 ‘잔혹한 판타지’인 이유는 이 부부가 만나는 과거의 연인이 죽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결혼과 유학은 일종의 도피였으나 끝내 과거의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하여 안정적인 정착은 그들에게 요원한 일이 되고 만다. 반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홈을 잃어버리는 이들고 있다. 「크리스마스 캐러셀」의 열두 살 에밀리는 디즈니월드에서 버려진 뒤 ‘나’의 고모에게 공개 입양되었다. 아빠의 재혼으로 집을 떠나 미국의 고모에게 간 ‘나’는 에밀리의 생일을 맞아 디즈니월드로 원치 않는 동행을 하게 되고, 그곳에서 에밀리를 잃어버리고 만다. 에밀리는 디즈니월드에서 다시 혼자가 되어보는 경험을 해보고 싶어서 스스로 실종이 되었던 것. 이를 통해 에밀리는 과거에 엄마가 자신을 버린 것이 아니라 살려준 것임을 기억해낸다. 에밀리의 이야기를 듣는 과정에서 ‘나’는 아빠의 재혼을 받아들일 마음을 먹는다. ‘나’와 에밀리는 가족을 상실함으로써 ‘홈’을 잃어버렸지만, 자신의 의지로 새로운 ‘홈’을 찾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한편 고국(홈)을 떠나 타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현지에서의 의미 있는 만남은 또 하나의 안식처가 되어주기도 한다. 먼저 「골드 브라스 세탁소」를 보면, 유학생 모임에서 특별한 에피소드로 인연이 되어 연인으로 발전해가던 남성이 자신뿐만 아니라 유학생 커뮤니티 여기저기에서 똑같은 방식으로 플러팅을 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영은 배신감에 우울해한다. 그러나 곧 무뚝뚝하지만 인터뷰를 진행하며 특별한 방식으로 소통을 이어가던 세탁소 주인과의 만남에서 위안을 얻는다. 「뷰잉」은 미국 유학 시절에 만난 맹 선생님의 부고 소식에 3년 전, 그곳에서의 힘들었던 기억을 떠올리는 이야기이다. 혼란스럽고 힘든 시기의 특별한 만남은 현재에도 여전히 따뜻한 온기의 기억으로 남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나이트호크스」와 「뜰 안의 볕」은 미로 같은 불안한 현실 속에서 헤매고 방황하는 이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담겨 있는 작품이다. 미국에서 유학 생활 중인 가난한 부부의 위태로운 관계와 그들이 벌인 한밤의 병원 투어를 그린 「나이트호크스」는 동명의 호퍼 그림 속 인물들에 부부의 모습을 투영하며 캄캄한 밤의 한가운데 놓인 보호받지 못하는 이방인의 암담한 미래를 겹쳐놓는다. 또한 미국에서 목회학 석사 졸업 이후의 진로를 고민하는 주인공 늘봄의 복잡한 마음을 담아낸 「뜰 안의 볕」은 기독교 커뮤니티에 대한 회의와 환멸 속에서 자신을 비롯해 각기 다른 믿음과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들의 정체성에 대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 두 작품 역시 그 끝이 어둡지만은 않다. 「나이트호크스」의 부부는 새해 인사를 나누고 집으로 돌아가고,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지 못하던 사람들이 모인 「뜰 안의 볕」의 정원에서는 모두에게 공평한 밤, 모두 반딧불이의 빛을 바라보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소설집 마지막에 자리한 「우리들의 파이널 컷」은 죽은 할머니의 유산 상속을 위해 한국에 들어와 소식이 끊긴 아버지를 찾는 딸의 이야기를 인터뷰 형식으로 담아낸 작품이다. 그러지 않아도 타지에서의 팍팍한 삶에서 장애를 가진 아버지의 존재는 무거운 짐일 뿐이었고, 모질게 아버지를 한국으로 돌려보낸 뒤에는 그나마 할머니로부터 받던 지원도 끊겨 더 힘들게 살아야 했던 그녀가 원망과 회한의 시간 뒤에 뒤늦게야 아버지가 가졌던 사랑의 크기를 확인하게 되는 과정은 늘 조금 늦게 도착하는 생의 진실, 그래서 더욱 반짝이는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이별과 만남, 도피와 귀환의 플롯에서 보이는 보통의 슬픔에는 운명을 개척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마주하는 현실의 벽이 미로처럼 놓여 있다. 문지혁의 ‘헤이코리안 플롯’에 각인된 미로를 기억하며 유난스러운 희비극을 떠올릴 사람은 없을 것이다. 여기 이 소설들에 부서진 벽과 같은 전위적 변화는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어지러운 미로에서 찾아낸 지름길들이 있다. 그들은 천천히 만나고 이야기로 만난다. 이별의 순간을 사랑의 순간만큼이나 삶의 중심에 놓는다. 도피 속에서 길을 잃을 땐 타인의 도피처가 되어주고 돌아가는 것을 패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박혜진 해설「슬픔의 생애」에서

이번 소설집의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박혜진은 ‘비겁’이라는 단어에 초점을 맞춰 ‘과정’이라는 지옥에서 성장을 분실한 채 자신에 대한 확신 없이 스스로에게 비겁한가, 질문할 수밖에 없는 작품 속 인물들을 살펴본다. 그러고선 이 ‘비겁’이라는 단어가 소설 속의 발화자뿐만 아니라 읽는 이의 내면에도 균열을 내었음을 확인한다. 그리고 동시에, 그 틈에서 새로운 길이 시작되는 것을 또한 본다. 하여 “절박한 딜레마적 상황 속에서 현실적인 용기의 틈을 찾으로 변해”가는 것이야말로 “문지혁 소설의 인생론이”라고 역설한다. 『고잉 홈』을 읽다 보면 “슬픔과 비겁에 대한 두려움은 희망과 환대를 향한 기대에 자리를 내주고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미 삶이라는 길 위에 서 있는 것일지 모른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를 때, 때로는 나와 닮은 저곳의 누군가가 있다는 것만으로 힘을 얻기도 한다. 그 힘이란 그저, 조금 헤매고 길을 잃어 돌아가더라도 마침내 도착하리란 것을 아는 사소한 희망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문지혁의 ‘고잉 홈’의 길에 숨어 있는 것도 바로 그것이다.


가야 할 곳은 정해져 있고 거기가 어딘지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그러니까 그 사이에서 우리가 집이라고, 고향이라고, 본토라고 부르고 믿는 모든 곳은 결국 길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우리는 모두 길 위에 서 있고, 언젠가 이 여행이 끝나면 비로소 다 같이 손을 잡고 노래를 부르며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모두에게 그 여행이 너무 고되지 않기를.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우리는 도착할 거니까.-‘작가의 말’에서
 






Mazeppa
김안 저 / 12,000원 / 문학과지성사

“나는 실패하고,
나는 전진하기에,
이것은 나의 몫이므로.”
세상의 고통을 받아쓰는 시인의 숙명
익숙한 지옥에 울려 퍼지는 광기의 노래
김구용시문학상·현대시작품상·딩아돌하우수작품상 수상 시인 김안의 네번째 시집

2004년 『현대시』를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해 올해로 시력 20년을 맞이한 시인 김안의 네번째 시집 『Mazeppa』가 문학과지성 시인선 597번으로 출간되었다. 문단의 유행이나 세간의 기조에 연연하지 않고 자기만의 속도로 정직하게 써 내려온 50편의 시를 3부로 나누어 묶었다. 마지막 부에 수록된 「숭고」는 “꾸밈없는 언어로 현실을 직시하며 세계와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적 성찰을 보여”준다는 평과 함께 딩아돌하우수작품상을 받은 바 있다. 2000년대 초 치열하고 관능적인 언어 실험을 선보이며 문단에 데뷔한 젊은 시인. 세계와 불화하는 자아로서 자폐적인 절망을 쏟아내던 소년은 어느덧 중년의 사내가 되어 “피와 먼지가 엉긴 거울들로 가득한 방”(「아오리스트」)에 서서 스스로를 마주한다.
이번 시집의 표제작이자 서시의 자리에 놓인 「Mazeppa」는 우크라이나의 독립 영웅, 이반 스테파노비치 마제파Ivan Stepanovich Mazepa의 삶 위에 시인의 얼굴을 겹쳐놓는다. 귀족 가문의 견습 기사였던 마제파는 백작 부인과 금지된 사랑을 나눈 죄로 광야에 버려졌으나, 오직 광기만으로 살아남아 두고두고 회자되는 전설적인 영웅으로 거듭난다. 그러나 이 시에서 새로 씌어진 마제파의 서사는 위인의 일대기라기보단 나약한 한 사내의 이야기에 가깝다. 이 시집의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류수연은 그것을 “항상 실패하지만, 그럼에도 전진해야 하는 숙명을 지닌 자, 바로 시인 자신의 얼굴”로 읽어낸다. 가장 깊은 바닥까지 파고든 자만이 볼 수 있는 풍경, 시인 김안이 도달한 지옥이 이곳에 펼쳐진다.


“나는 나의 귀로 듣는다, 모든 마음이 내 것인 양”
듣는 몸으로 대신 말하는 사람

나는 듣는다,
토끼가 겨울나무를 파먹는 소리,
얼어버린 눈동자가 물결처럼 갈라지는 소리.
나는 듣는다, 술로
연명하다 굶어 죽은 시인의 창밖으로 계절처럼
전진하던 기차 소리,
그 소리에 밤하늘의 불꽃이 흔들리고,
낭만과 폭력을 구분하지 못하던 시절과,
죽은 이의 입속으로 들어가는 벌레의 날갯소리,
듣는다,
음독이 묵독이 되는 소리,
기억을 잃은 이들이 거울 앞에 서는 소리,
-「Mazeppa」 부분

앞선 표제작에서 “나는 듣는다”로 시작하는 반복적인 선언은, 말의 관절을 비틀며 유례없고 파격적인 언어를 구사해온 시인의 발자취를 떠올릴 때 다소 놀라운 변화다. 그는 “내 질문들은 자꾸만 어리석어지고, 어리석어지니 입을 틀어막”(「뒤풀이」)기로 결정한 듯이 “입을 다물고 입속으로 들어가 다시 입을 다문 채”(「젖은 책」) 가만히 들을 뿐이다. “언어의 팔을 휘두르는 게 한때 제 직업이었”던 시인은 이제 “나는 나의 귀로 듣는다, 모든 마음이 내 것인 양”(「Mazeppa」) 듣는다.
그 말들의 행방이 궁금하던 차에 시시각각 변하는 신체들이 눈에 띈다. 이 시에 등장하는 화자의 몸은 불현듯 늘어나고(“여보, 나는 당신을 생각하며 조금 더 길어진다오”, 「백수광부」), 움푹 패거나 부풀어 오르며(“움푹 팬 얼굴에 손을 넣었더니 아무것도 없었다”, 「코케인」), 짐승의 신체 부위가 몸의 일부가 되기도 한다(“머리에 솟은 부드러운 뿔을 기르며”, 「아오리스트」). 시인이 들은 말들이 그의 몸에 흡수되고 뼈와 영혼에 각인된다. 그리하여 신체의 일부가 된다. 그가 시집에 부려놓은 말들은 외부의 말에 대한 내부의 현상학인 셈이다.
이렇듯 타인의 말을 먹고 태어난 김안의 화자들은 시와 생활 사이에 몸을 반쯤 걸쳐둔 채로 삶을 조망한다. 「여닫이문」에는 번잡한 술자리를 벗어나 밖으로 나가던 중 문 사이에 낀 화자가 등장한다. “문은 정확히 내 몸을 길게 반으로 갈라놓고선 꿈쩍도 하지 않”는다. 이러한 처지는 “서로 밀어주지 못할 바엔 조금씩 나누면서 살아야”겠다는 체념 혹은 깨달음으로 이어진다. 「소리경」에서 그의 몸 절반은 생의 “한때들”을 쏟아낸다. 때로는 흐리고, 때로는 비바람이 부는 “한때들이 만드는, 한 떼의 폭음”을 듣는다. “되뇌는 건 내가 아닌 광기의 몫”이기에 시인은 그것이 “텅 빈 소리뿐”이라 할지언정 다시 들을 수밖에 없다.


“이것이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다”
광야로 나아가는 아늑한 광기

시와 삶, 삶과 시 사이의 위태로운 균형 감각은 술에 취해 휘청휘청 걷는 사람을 연상시킨다. “사람이었듯 시인인” 화자는 “서로의 술잔을 채”(「코케인」)우며 흥청망청 취한다. 마치 맨정신으론 살기 어렵다는 듯이 “취해 나뒹굴며 황망하게 흘러”(「입춘」)다니며 부끄러움을 잊으려 한다. 이러한 술자리는 그에게 일상의 이면에 감춰져 있던 지옥을 자각게 한다. “돼지 속살이 타오르는 리듬에/부딪는 술잔”(「시인의 말」)을 마주하거나 “기름진 테이블에 둥글게 모여 앉아”(「뒤풀이」) “고기나 뒤집다가 마흔이 넘”(「말과 고기」)어버린 사내는 당면한 현실의 문제를 잊기 위해 술을 들이켜지만, 오히려 그곳에서 지옥의 민낯을 더 선명하게 목격할 뿐이다.
철없던 소년은 성장하며 세계의 진의를 의심하게 된다. 지난 시절의 야욕은 사그라들고 사랑했던 사람은 남이 된 것만 같다. 시인은 그럼에도 쓰는 수밖에 없고, 쓰는 것밖에 할 수 없는 스스로를 낯설어 한다. “이 또한 사랑이고 삶이라고 해봤자/변명과 술수로 한없이/부끄러운 연옥일 뿐이라서”(「시인의 말」) 한없이 회의하고 괴로워한다. 그로 인한 부끄러움과 죄책감, 분노와 환멸은 은은한 광기로 변모한다. 그는 “생활, 생활 속에서 그저 용서받는 광기만을/아늑한 광기만을 구하고 있었”(「소리경」)다며 반성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여전히 남아 있는 광기의 흔적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번 시집 『Mazeppa』는 바로 그 광기를 되찾아가는 여정을 담고 있다.
그의 곁에는 딸이 자라고 있다. 시인은 딸과 함께 산책길을 걷는다. 길 위의 수많은 죽음 앞에 사로잡힌 그와 달리, 어린 딸은 있는 그대로 그것을 받아들인다. 절망의 광기에 사로잡혔던 시인은 그런 딸의 손을 잡고 다시 지옥의 문을 열어젖힐 용기를 얻는다(“울던 딸아이를 달래 그네에 태우고 힘껏 밀다 보면 집집마다 뿌옇게 등 켜지고”, 「이 문장을 끝내지 못한 곳에서」). 아빠와 나란히 앉아 아는 “이름들”과 “이름 모를 것들을”(「간절곶」) 적는 어린 딸의 모습에서 한때 시인의 것이었던 얼굴이 겹쳐 보인다. 언제나 어린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인, 길들지 않는 귀로 타인을 듣고자 하는 시인 김안. 그의 시는 오래오래 광야를 누빌 것이다.

바라보는 일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놀이터에서 뛰어노는 아이들, 개를 데리고 산책을 나온 사람들, 아이의 무릎에 난 흉터, 잠든 아내에게 붙어 있는 생활의 악몽, 겁먹은 채 부유하는 흰 종잇조각들, 그 입구에서 동동거리는 내 뒷모습. 빗소리 거세지고 잠이 오지 않아서 유일한 바깥인 양 책을 펼치면, 난 이미 비의 어두운 눈. 이것은 끝나지 않을 것이지만, 마음 전부로 눈먼 비유 하나 얻고 돌아와 반듯하게 누우면,

마음을 다 쏟은 어리석은 귀신이 내 옆에 물처럼 하얗게 누울 것이다.
-「마음 전부」 부분
 







모든 것은 선을 만든다
팀 잉골드 저 / 차은정, 권혜윤, 김성인 역 / 22,000원 / 이비

모든 존재는 살기 위해 선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이 선들은 삶 속에서 서로 뒤엉킨다. 이 책은 선으로서의 세계와 삶에 관한 한 연구이다. 팀 잉골드는 선을 통해 생명, 땅, 바람, 걷기, 상상력 그리고 인간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한다.
방랑자의 걷기를 닮은 이 책은 그 흔적과 선을 통해 물질세계에 대한 우리의 사고를 생명으로 돌려놓는다. 인류학을 바탕에 두면서 철학, 지리학, 사회학, 예술, 건축학 등 다양한 학문 영역을 연결하고 아우르며 매듭을 만들고 풀어낸다.

추천의 글

객체 없는 세계의 흔적 기행 -김재인. 철학자.

팀 잉골드의 시선은 '날것'들 혹은 '생생한 것'들을 예사롭게 보아 넘기지 않는다. 문명의 골격은 굳건해서 영구히 지속될 것 같지만, 문명은 날것들의 표면에 건조된 '겨우 존재하는 건조물'에 불과하다. 인류학자로서 '인간'이라는 스펙트럼을 가장 자연적인 것과 가장 인공적인 것 사이에서 살피는 잉골드는 문명의 오만을 경고한다.
금속은 녹슬고 파이프와 전선은 쥐에 갉히고 콘크리트 벽은 갈라진다. 자연과 시간은 그렇게 견고한 것에 틈을 낸다. 잉골드의 시선이 이런 곳들을 향하고 있다면, 철학자 들뢰즈와 과타리는 갈라지고 부스러지는 이런 누수 지점을 찾아 그리로 빠져나가자자고 제안한다. 그것이 이른바 '도주선'이다. 도주란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시도가 아니라 다소간 군색하고 비열하기까지 한 몸부림이다. ≪모든 것은 선을 만든다≫에서 잉골드가 보여주는 지점들은 도주를 시도해 볼 만한 지점들이기도 하다.
책을 읽다 보면 어쩌면 저런 곳들을, 아니 저런 곳들만 찾아냈을까 하는 신기함마저 터져나온다. 세상이 그런 허약함들에 기초하고 있다면, 인간이 그동한 구축해 온 문화와 문명의 미래는 어떠할 것인가? 메를르퐁티와 아렌트를 넘어 베르그손과 나가르주나 혹은 니체까지 미치지 못한 한계는 남지만, 그레이엄 하만의 '객체 지향 존재론'과 까스뜨루의 '퍼스펙시브주의'에 맞서는 잉골드의 '객체 없는 세계'는 큰 울림과 설득력을 갖는다. 다만, 내가 오래 공부해 익숙한 들뢰즈와 과타리의 철학은 그렇다면 어떤 자리에 있을까? 책을 읽는 내내, 또 책을 덮으며, 길게 울리는 질문이다.

출판사 책 소개

≪모든 것은 선을 만든다≫는 사회 인류학을 비롯한 근대 사회과학이 부딪히는 근본적인 한계를 지적하고 대안을 모색했던 인류학자 팀 잉골드가 60세에 이르러 30년간의 연구를 집대성한 3부작 중 하나다.
덩이와 블록, 체인, 컨테이너로 보았을 때 설명할 수 없던 것과 드러나지 않았던 것들을 선과 매듭으로 읽어내며 벽, 산과 마천루, 지면 …… 존재와 생명을 이야기한다. 나아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날씨와 대기를 선으로 풀어내면서 매질로서의 공기와 빛, 소리의 감각을 가져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선의 관점에서 인간의 의미에 대해 묻고 동사로서의 인간, 선으로서의 삶과 교육에 대해 논한다.
방랑자의 걷기를 닮은 이 책은 인류학을 바탕으로 생태학, 건축학, 기상학, 미학, 사회학 등의 방법론적 융합을 통해 지구 주민의 존재론을 이야기하는 책이다.


선과 매듭

선과 매듭으로 생각했을 때 보이는 것이 있고 설명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저자는 학문의 정의와 범주부터 재검토한다. 생태학은 유기체와 환경에 관한 연구로 정의해왔고 그 속에서 유기체는 껍질과 피부에 에워싼 덩이를 전제로 한다. 그러나 덩이만으로 살아갈 수 없다. 실제로 생명은 덩이와 선의 조합이며 선이 있어야, 그 선이 다른 선과 만나야 생명이 시작된다. 저자는 군집과 같은 초유기체를 모델로 하는 사회 개념을 비판하면서 덩이의 원리에 기초하는 한 생태학과 마찬가지로 사회학은 살아가는 존재들 간의 관계라는 진정한 의미를 밝힐 수 없으며 선의 관점에서 사회적 삶이란 서로 활기를 불어넣는 생명 활동임을 말한다.
그에 따르면 우리 눈에 선들이 엮어가는 그물망의 세계가 보이지 않는 이유는 블록, 체인, 컨테이너 등 분절된 덩이의 메타포가 세계를 압도해왔기 때문이다. 단절과 파편으로 귀결되는 것들은 기억이 없다. 낱개의 체인 고리가 풀리면 체인이 어디에서 어떻게 걸려 있었는지를 기억하지 못하지만 선은 매듭에서 풀려도 매듭의 형상을 기억한다. 선들은 과거의 연결 기억을 형상으로 남겨두며 그 상태에서 더욱 새롭게 다음을 기약한다. 또 다른 선들과 엮이고 풀리기를 반복하면 나아가는 선. 우리는 그렇게 연결되고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이 관계는 고정되거나 불변한 것이 아니라 엮였다가 풀리기를 반복하며 삶의 자취를 남긴다. 모든 것을 기억하며 흔적을 남기는 선의 행적은 보이지 않는 비물질적인 것을 포괄한다.
출발점과 도착점이 정해져 있는 직선이 아니라 감각을 동원해서 실과 흔적을 찾아가는 삶. 방랑자의 걷기처럼 저자는 벽, 산과 마천루. 지면. 지식 사이를 걸으며 선과 매듭을 읽고 인류학, 건축학, 철학, 심리학을 연결하고 엮어낸다.


날씨, 대기, 빛, 소리, 색

유기체를 덩이로 규정할 때 생명의 활동성을 해명할 수 없듯이 생태학을 환경이라는 베이스보드에 고형물이 어수선하게 널려 있는 것으로 간주하면 그 역동성을 잃는다. 현실 세계는 공기, 빛, 소리, 색 등의 다양한 매질로 넘쳐나며 그것들의 끊임없는 흐름은 날씨로 나타난다. 우리는 그런 날씨의 영향을 받고 있고 그 매질 속 선을 따라 상호 침투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세계 인식에서 날씨를 제거했다. 저자에 따르면 날씨 없는 세계는 근대 유럽에서 일어난 전도의 결과이다. 근대 이전 날씨의 경험은 공기라는 매질과 그 속에서 생활하는 우리의 정서를 통합해왔다. 그러나 기상학이 성립되면서 대기는 정서를 배제한 산소와 질소 가스로 다뤄지고 미학의 분위기는 공기가 아닌 에테르의 감각적인 경험만을, 진공상태에 놓인 감수성만을 보여준다.
물고기의 움직임이 바닷속에 있음을 가리키듯이 우리의 움직임은 공기 속에 있음을 가리킨다. 움직임의 호흡은 공기가 생성하고 유동한다는 것을 드러내고 날씨 세계는 신체의 정신적인 참여를 유도하면서 감각의 경로를 따라 선을 만들어낸다. 무엇보다 이 선이 엮는 매듭과 그물망은 공감을 만들어낸다. 이는 고고학자가 석조 기념물을 쓰다듬을 때 자기 손에 돌의 손길을 느끼는 것이고 북서 태평양 연안의 툴링깃족의 빙하가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빙하가 귀가 있어서가 아니라 우레같이 갈라지는 얼음 소리와 눈뜰 수 없을 정도의 하얀빛으로 꽉 찬 대기 속에 자신의 소리 선이 공감을 일으킨다고 보기 때문이다. 공기와 빛과 소리에 완전히 에워싸이는 공감의 경험이야말로 근대가 지운 대기일 것이다.
우주적인 것과 정동적인 것의 융합과 분열로서 대기의 날씨 세계는 시각적, 청각적, 촉각적 지각을 통해 선이 생성되는 삶의 현장이다. 잉골드는 깁슨의 지각 심리학과 메를로퐁티의 현상학을 거쳐 날씨-세계를 우리 지각의 영역으로 가져온다. 매질로서의 공기를, 밤하늘의 별빛 속에서 나를 떠난 내가 우주와 통합하는 시각적 의식을 포착하고자 했던 고흐의 그림 등을 이야기하며 빛과 소리. 색의 감각을 다시 새롭게 가져온다.


동사로서의 인간

그렇다면 선의 관점에서 인간이란 무엇일까. 저자는 스페인 철학자 호세 오르테가의 인간론을 가져와 인간적 삶의 문법적 형태는 동명사라고 말한다. 이것은 인간의 실존이 선험적으로 주어지지 않고 생산적으로 성취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정신에 인간성을 호소하는 것은 도달할 수 없는 결말을 기원에 놓는 것과 같다. 잉골드는 인간 발생론의 동명사는 주어도 목적어도 아닌 선으로서 존재한다고 말한다. 선의 문법적 형태는 동사이다. 이 관점에서 인간은 능동의 의지적 주어로서가 아니라 수동의 경험적 행위에서 성장한다. 그는 수동에 대한 능동의 우위를 주장하는 근대 유럽의 인간관을 뒤집고 복종의 인간화를 이야기한다.
다양한 존재의 선들이 엮이는 세계에서 삶은 의도한 대로 진행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근대인의 주체 신화는 다양한 존재의 세계를 정복하듯이 타자화하고 인간 자신을 고립시켜 왔다. 저자는 실행과 제작의 의지적 주체를 전복하고 그저 다른 이들이 시도한 선을 계속 이어받는 것, 자취를 찾아내고 그 선을 연장해서 이용하는 것이 삶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주어와 목적어의 관계가 아니라 선들의 동사적 조응으로서의 실천이다.
잉골드는 의도와 주의, 미로와 미궁, 하기와 겪기, 만들기와 성장하기, 사이와 사이-안 등 다양한 이항 비교 대조 속에서 교육으로 나아간다. 그에 따르면 교육은 근대적 주체가 재현한 세계에 대한 지식을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재현의 세계 밖으로 존재를 끌어내고 대기의 공감 세계에 그 선을 풀어내는 것이다. 방랑 속에서 찾아가는 것, 선들의 끊임없는 엮임과 풀림의 도정에서 다른 선들에 조응하는 것, 삶의 궤적이 그물망으로 짜이듯이 그 위를 서성이는 것, 교육이란 이 모든 방랑에 뛰어드는 용기를 북돋는 것이라고 말한다.












맥주의 지리
마크 패터슨, 낸시 홀스트 풀렌 저 / 34,000원 / 푸른길

맥주는 물, 차에 이어 세 번째로 널리 소비되는 음료이다. 맥주를 만드는 4가지 기본 재료들, 즉 물, 곡물, 홉, 효모는 맥주를 단순한 음료처럼 보이게 하지만 맥주의 복잡성은 와인과 견줄 정도다. 맥주에는 라거, 에일 등 다양한 종류와 앰버 에일, 인도 페일 에일, 필스너, 스타우트 등의 다양한 스타일과 하위 스타일이 있다. 현재까지 맥주양조협회가 분류한 맥주 스타일은 140가지가 넘는다. 안목이 매우 뛰어나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많은 라거와 에일의 스타일과 하위 스타일을 구별하기는 어렵다. 어떻게 그 간단한 음료가 이렇게 복잡할 수 있을까? 이 책은 그 복잡성에 관한 해답을 지리에서 찾는다.
지리는 맥주 재료의 공급뿐만 아니라, 맥주의 생산과 유통에도 영향을 미친다. 와인에 쓰이는 포도처럼, 맥주는 재료 면에서 지리적이다. 맛의 차이는 사용된 곡물과 홉의 다양성에서 나온다. 어느 정도까지는 다양한 보리 등의 곡물과 홉이 재배되는 지역의 토양과 기후 같은 차이가 맥주의 특성에서 미묘한 차이를 만들어 낸다. 또한 물과 물에 함유된 미네랄 함량도 맥주가 내는 맛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심지어 세계의 여러 지역에서 온 다양한 종류의 효모도 맥주의 맛에 영향을 미친다.
특히 수제 맥주의 생산은 부분적으로 재료에 의존하지만, 양조업자와 맥주 스타일의 지방주의(또는 지역주의)에 더 영향을 받는다. 예를 들면, 태평양 북서부에서 온 맥주는 홉 맛이 난다. 반면에 태평양 북동부 지역의 맥주 양조업자들은 영국의 에일과 포터를 선호한다. 지역에 따른 선호는 지역의 역사, 신지방주의의 역할 그리고 지방 맥주 양조 마스터들의 혁신적인 특성이 결합해 내는 시너지 관계에 기인할 것이다. 또한 분포는 맥주의 종류와 스타일에 의해 결정된다. 큰 양조장, 특히 미국 스타일의 라거 양조장들은 국제적으로 분포하는 형태이지만, 작은 수제 맥주 양조장들은 맥주가 생산되는 지역 사회 주변에 국지적으로 분포하는 경향이 있다. 게다가 유럽에서의 맥주 생산은 기원지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맥주의 스타일과 브랜드의 관계는 다양한 지역에서 성장하고 있으며 지역 사회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다. 그만큼 맥주는 많은 지역, 환경 그리고 사회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맥주가 어떻게 지역, 환경, 사회에 영향을 끼쳤는지를 공간적 측면에서 다루는 이 책은 크게 지역, 환경, 사회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 17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리학자와 비지리학자를 포함하는 저자들의 개별 주제는 역사 전반에 걸친 맥주의 영향, 지방적 규모에서 세계적 규모로 맥주의 이동, 세계적 생산과 수제 맥주 양조의 이분법적 본질, 수제 맥주의 신지역주의 그리고 지역 지리가 맥주의 가장 필수적인 재료인 물, 맥아, 홉 그리고 효모에 미치는 영향을 살펴본다. 맥주의 재료를 조달하는 방식은 대부분 지리에 달려 있고, 사람들의 전통은 지리를 반영하고, 맥주의 생산과 유통 방식은 지리에 따른다는 것을 소개하는 이 책은 맥주의 과거와 현재의 생산과 유통 그리고 사회적 영향을 훌륭하게 지도화한 새로운 맥주책으로, 맥주와 지리를 좋아하는 누구나에게 즐거운 시간을 가져다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