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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81가지 심리실험 - 일과 휴식편 나이토 요시히토 저 / 주노 그림 / 서수지 역 / 16,500원 / 사람과나무사이 기발하고 기상천외한 81가지 심리실험을 통해 개인과 집단의 미묘한 심리, 일과 휴식의 메커니즘을 날카롭게 통찰하다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81가지 심리실험 - 일과 휴식편』은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심리실험’ 시리즈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뇌과학, 정신의학, 사회심리학, 행동경제학 등 다양한 분야의 전 세계 최고 권위를 가진 학자들의 흥미롭고도 기상천외한 81가지 심리실험을 통해 ‘욕망’이 구체적인 일상의 삶에서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행동으로 이어지게 하는지, 조직과 비즈니스 현장에서 개인과 집단의 미묘한 심리가 작동하며 일과 휴식의 메커니즘을 만들어내는지 등을 날카롭게 파헤친다.
이 책에 소개되는 81가지 심리실험 이야기는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모두 ‘일’과 ‘휴식’이라는 키워드와 맞닿아 있다. 흥미진진한 심리실험 이야기를 읽어 가다 보면 독자는 자신과 타인, 그리고 개인과 집단의 내면에 숨어 있는 다양한 욕망과 니즈의 실체를 간파하게 될 것이다. 또한 그 연장선에서 독자는 개인과 집단의 크고 작은 욕망과 니즈가 어떻게 행동과 실행으로 이어지며 구체적인 변화를 일으키는지 깨닫게 될 것이며, 개인과 집단의 욕망이 자동차의 엔진이 되어 인간사회의 다양한 영역, 그중에서도 특히 비즈니스 영역을 움직이는지 통찰하게 될 것이다.시리즈 세 번째, 네 번째 책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62가지 심리실험 - 욕망과 경제편』『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88가지 심리실험 - 자기계발편』에 이어 이번 책 역시 저명한 심리학자이자 일본 릿쇼대학교 객원교수이며 『말투 하나 바꿨을 뿐인데』『이제는 심리전에서 절대로 밀리지 않는다』『만만하게 보이지 않는 대화법』등의 베스트셀러로 국내에서도 인지도가 높은 저자 나이토 요시히토가 정리하고 집필했다. 뇌과학, 정신의학, 사회심리학, 행동경제학 등 다양한 분야 전 세계 최고 석학들의 흥미진진한 81가지 심리실험을 통해 인간의 욕망과 결부된 일과 휴식의 작동 메커니즘과 개인과 집단의 미묘한 심리, 복잡미묘한 관계를 날카롭게 파헤치고 통찰하는 책! 사람과나무사이 출판사가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63가지 심리실험 - 뇌과학편』『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61가지 심리실험 - 인간관계편』『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88가지 심리실험 - 자기계발편』『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62가지 심리실험 - 욕망과 경제편』으로 이어지며 많은 독자에게 사랑받은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심리실험’ 시리즈 다섯 번째 책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81가지 심리실험 - 일과 휴식편』을 출간했다. 이번 책은 시리즈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뇌과학, 정신의학, 사회심리학, 행동경제학 등 다양한 분야의 전 세계 최고 권위를 가진 학자들의 흥미롭고도 기상천외한 81가지 심리실험을 통해 ‘욕망’이 구체적인 일상의 삶에서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행동으로 이어지게 하는지, 조직과 비즈니스 현장에서 개인과 집단의 미묘한 심리가 작동하며 일과 휴식의 메커니즘을 만들어내는지 등을 날카롭게 파헤친다. 시리즈 세 번째, 네 번째 책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62가지 심리실험 - 욕망과 경제편』『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88가지 심리실험 - 자기계발편』에 이어 이번 책 역시 저명한 심리학자이자 일본 릿쇼대학교 객원교수이며 『말투 하나 바꿨을 뿐인데』『이제는 심리전에서 절대로 밀리지 않는다』『만만하게 보이지 않는 대화법』등의 베스트셀러로 국내에서도 인지도가 높은 저자 나이토 요시히토가 정리하고 집필했다. 이 책에 소개되는 81가지 심리실험 이야기는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모두 ‘일’과 ‘휴식’이라는 키워드와 맞닿아 있다. 흥미진진한 심리실험 이야기를 읽어 가다 보면 독자는 자신과 타인, 그리고 개인과 집단의 내면에 숨어 있는 다양한 욕망과 니즈의 실체를 간파하게 될 것이다. 또한 그 연장선에서 독자는 개인과 집단의 크고 작은 욕망과 니즈가 어떻게 행동과 실행으로 이어지며 구체적인 변화를 일으키는지 깨닫게 될 것이며, 개인과 집단의 욕망이 자동차의 엔진이 되어 인간사회의 다양한 영역, 그중에서도 특히 비즈니스 영역을 움직이는지 통찰하게 될 것이다. 행복한 기분일 때 생산성이 눈에 띄게 향상될 수밖에 없는 심리학적 근거는? 욕망이 어떻게 인간을 움직이는지, 개인의 욕망이 어떻게 집단의 욕망으로 발전하고 사회의 다양한 영역, 특히 경제를 움직이는지 날카롭게 파헤치는 기상천외한 81가지 심리실험 ▣ 행복한 기분일 때 생산성이 눈에 띄게 향상될 수밖에 없는 심리학적 근거는? - 영국 워릭대 앤드류 오즈월드 교수의 ‘행복한 기분과 생산성의 연관관계 실험’ “직원이 행복한 회사일수록 생산성이 높다”라는 대다수 경제경영서의 주장은 사실일까? 이를 증명하기 위해 영국 워릭대학교 앤드류 오즈월드(Andrew Oswald) 교수는 ‘행복한 기분일 때 정말로 생산성이 올라갈까?’라는 가설을 확인하기 위해 반복적으로 수 차례 실험을 진행했다. 참가자가 700여 명에 달한 대규모 연구였다. 연구팀은 실험 참가자가 즐거운 기분을 느낄 수 있도록 첫 번째 실험과 두 번째 실험에서는 ‘코미디 영상’을 활용했다. 참가자는 10분가량 웃긴 영상을 보고 나서 두 자리 숫자 다섯 개를 더하는(31+51+14+44+87=?) 단순한 계산 작업을 수행하기만 하면 되었다. 이 실험에서는 최대한 빠르게 많은 문제를 풀도록 지시했다. 정답을 맞힐 경우 보수로 한 문제당 0.25유로(350원 정도)를 지급했기에 참가자들은 진지하게 문제 풀이에 집중했다. 연구팀은 정답률로 생산성을 측정했다. 실험 결과, 코미디 영상을 보고 신나게 웃고 나자 정답률이 상승했다. 다시 말해 생산성이 향상된 것이다. “즐거운 기분을 느낄 수 있다면 생산성이 높아진다”라는 가설은 이로써 사실로 입증되었다. 가설을 검증한 연구팀은 변수를 바꾸어 실험에 나섰다. 세 번째 실험에서는 실험 참가자에게 과일과 초콜릿을 제공하고, 참가자가 달콤한 간식을 먹고 나서 행복한 기분이 들었을 때 어떤 변화가 생기는지 관찰했다. 달콤한 음식을 먹고 난 후에도 역시 생산성이 올라갔다. 코미디 영상이든 맛있는 음식이든 행복한 기분을 느끼게만 한다면 그 방법은 무엇이든지 상관없는 모양이었다. 오즈월드 교수의 실험으로 어떤 형태로든 행복함과 즐거움을 느낄 수 있게 해 주면 직원의 생산성이 12퍼센트 정도 향상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 학습(일)과 학습(일) 사이에 수면’을 끼워 넣으면 재학습에 드는 노력이 절반으로 줄어든다고? - 프랑스 클로드베르나르 리옹1대 스테파니 마자 교수의 ‘수면과 학습의 상관관계 실험’ 같은 시간을 공부한다고 전제할 때 ‘학습’과 ‘학습’ 사이에 ‘수면’이 끼어들 때와 그렇지 않을 때 학습 효과에 어떤 차이가 있을까? 이를 밝히기 위해 프랑스 클로드베르나르 리옹1대학교 뇌과학연구소의 스테파니 마자(Stéphanie Mazza) 교수와 연구팀은 “재학습은 짧고 기억 보존은 길다”라는 수면의 중요성을 밝히는 논문을 발표했다. 연구팀은 대학생 40명을 두 그룹으로 나누어 스와힐리어 단어를 완벽하게 외울 때까지 두 차례씩 학습시켰다. 조건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로 설정했다. A 그룹: 아침 9시에 기억 → 12시간 경과 → 같은 날 밤 9시에 다시 한번 학습 B 그룹: 밤 9시에 기억 → 12시간 경과 → 다음 날 아침 9시에 다시 한번 학습 연구팀은 일주일 후와 6개월 후에 스와힐리어를 어느 정도 기억하고 있는지 테스트했다. 그러자 B 그룹, 즉 학습과 학습 사이에 수면을 끼워 넣은 그룹 학생들의 경우 재학습에 걸린 시간이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일주일 후에도 6개월 후에도 A 그룹에 비해 B 그룹 성적이 좋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고등학생 시절, 선생님이 공부하고 나서는 딴짓하지 말고 바로 자라고 누누이 말씀하셨다. 당시에는 근거가 있는 말인지 의심했는데 실제 실험으로 그 효과를 밝혀낸 연구를 알게 되었다. 선생님이 그럴듯한 말을 지어내 잔소리하신 게 아니었다. 공부를 열심히 한 후에는 머리를 식힐 겸 노력한 자신에게 보상도 줄 겸 뭔가 다른 일을 하다 잠들고 싶다. 그냥 자면 억울하고 손해를 보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공부하고 나서는 엉뚱한 데로 새지 말고 바로 잠을 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기껏 공부한 내용이 머릿속에 남아 있지 않게 된다.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더라도 공부를 마치면 바로 잠자리에 들어 쿨쿨 자는 게 학습 효과를 높이는 비결이다. ▣ 직장 면접에서 ‘과거 실적’보다 ‘예상 실적’을 강조해야 더 높은 연봉과 더 좋은 조건을 얻을 수 있다는데? - 미국 스탠퍼드대 재커리 토말라 교수의 ‘잠재력 선호 실험’ 직장에서 연봉 인상을 두고 면접할 때 ‘과거 실적’과 ‘예상 실적’ 중 어느 쪽에 집중하는 것이 유리할까? 미국 캘리포니아주 스탠퍼드대학교 경영대학원의 재커리 토말라(Zakary L. Tormala) 교수는 실험 참가자들에게 “만일 여러분이 NBA 팀 관리자이고 어떤 선수의 이듬해 연봉을 정할 수 있다면 얼마를 책정하겠는가?”라고 물었다. 실험 참가자들은 선수의 프로필을 읽고 나서 연봉을 책정해야 했는데, 연구팀은 미리 두 가지 프로필을 준비했다. 하나는 과거 5년 동안 선수가 올린 득점, 즉 실적을 일목요연하게 보여 주는 프로필이다. 다른 하나는 5년 동안의 실적을 기재하고 나서 ‘6년 차에는 이 정도 득점을 올릴 수 있다’는 긍정적인 실적 예상에 중점을 두어 꾸민 프로필이다. 실험 참가자들은 프로필을 꼼꼼히 살핀 후 6년 차 연봉을 책정했다. 결과는 어떻게 나왔을까? 과거 실적을 보여 준 경우 연봉은 426만 달러, 긍정적인 실적 예상을 강조한 경우 연봉은 525만 달러가 책정되었다. 과거 5년 동안의 실적이 같더라도 긍정적인 미래 예상 실적을 추가하면 연봉이 100만 달러 가까이 오르는 것이다. ▣ 가격을 협상할 때 적절히 재치 있는 유머를 곁들이면 원하는 결과를 얻어 낼 확률이 높아지는 이유는? - 미국 캔자스대 캐런 오킨의 ‘사회적 영향력을 가지는 기법으로서의 유머 실험’ 치열한 비즈니스 협상 자리에서 재치 있는 ‘유머’가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는 데 확실한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증명한 실험이 있다. 미국 캔자스대학교의 캐런 오킨(Karen O’Quin)은 가상으로 그림을 사고파는 협상 실험을 진행했다. 실험에 앞서 참가자들에게 그림을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으로 나누어 흥정하는 것이고 판매자와 구매자는 제비뽑기로 결정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실제로 실험 참가자는 무조건 구매자가 될 수밖에 없는 장치가 숨겨져 있었다. 바람잡이 역할을 맡기로 한 구매자와는 협상 중 어떤 가격이 제시되든 마지막에 2,000달러를 양보하며 “이게 제 최종 제안입니다”라고 말하도록 각본을 짰다. 이때 바람잡이는 절반의 실험 참가자, 즉 구매자에게 농담을 건넸다. “이게 제 최종 제안입니다. 아, 좋습니다. 마음 쓰는 김에 특별히 제 반려 개구리를 얹어 드릴게요.” 사람에 따라 입꼬리가 미동도 하지 않을 수 있지만, 어쨌든 실험에 참가한 미국인에게는 잘 먹히는 기발한 농담이었던지 실험 참가자들의 웃음보가 터졌다. 바람잡이는 나머지 절반의 실험 참가자와 흥정할 때는 농담을 건네지 않은 채 “이게 제 최종 제안입니다. 금액은 ○○달러입니다”라고 기계적으로 말하도록 정해져 있었다. 과연 농담에 따른 차이가 있었을까? 농담을 건네 받은 실험 참가자들은 협상에 응해 가격을 절충해 주었을까? 연구진은 비율을 측정했다. 확실히 농담을 건넨 후 실험 참가자들은 흥정에 응하며 선선히 가격을 양보했는데 그 비율은 무려 53퍼센트나 되었다. 농담을 섞지 않고 가격만 공지했을 때 제시한 가격을 받아들이고 양보한 비율은 45퍼센트였다. 이로써 농담으로 흥정 분위기를 가라앉히고 상대방을 웃게 할 수 있다면 분명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가격 협상을 할 수 있음이 증명되었다. 아무리 시시하고 썰렁한 농담이라도 일단 시도해 보자. 어처구니가 없어 툭 터져 나온 웃음이라도 흥정을 순조롭게 만들 수 있다. 만약 내 농담에 상대방의 입꼬리가 미동도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럴 때는 양으로 승부를 걸어 보자. 상대방이 웃을 때까지 열심히 시도해 보는 것이다. 가벼운 미소라도 상대방이 웃기만 하면 성공이다. 실소든 미소든 다 웃음이기 때문이다. 웃음이 분위기를 풀어 주는 윤활유 역할을 하며 협상 분위기가 부드러워지면 상대방에게서 양보를 끌어낼 가능성도 그만큼 늘어날 수 있다. 좀 더 적게 일하고, 좀 더 많이 쉬고, 좀 더 큰 성과를 얻는 데 도움 되는 기발하고 흥미진진한 81가지 실험 ㆍ 행복한 기분일 때 생산성이 눈에 띄게 향상될 수밖에 없는 심리학적 근거는? - 영국 워릭대 앤드류 오즈월드 교수의 ‘행복한 기분과 생산성의 연관관계 실험’ ㆍ 학습(일)과 학습(일) 사이에 ‘수면’을 끼워 넣으면 재학습에 드는 노력이 절반으로 줄어든다고? - 프랑스 클로드베르나르 리옹1대 스테파니 마자 교수의 ‘수면과 학습의 상관관계 실험’ ㆍ 어려운 문제에서 물리적 거리를 두는 것만으로도 풀이가 한결 쉬워진다고? - 미국 코넬대 마노즈 토머스 교수의 ‘물리적 거리가 업무에 미치는 영향 실험’ ㆍ 예약할 때 고객을 고생시키면 예약 취소율이 크게 떨어진다고? - 영국 컨설턴트 스티브 마틴의 ‘예약 시간 잘 지키게 하는 방법’ ㆍ 칭찬은 왜 때로 고래를 춤추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맥 빠지게 할까? - 미국 컬럼비아대 스테이시 핀컬스틴 부교수의 ‘피드백이 목표 추구에 미치는 영향 실험’ ㆍ 아이를 자주 웃게 하면 저절로 공부에 재미를 붙인다고? - 미국 펜실베이니아주립대 앨런 카즈딘 교수의 ‘교사의 태도가 아이의 행동에 미치는 영향 연구’ ㆍ 직장 면접에서 ‘과거 실적’보다 ‘예상 실적’을 강조해야 더 높은 연봉과 더 좋은 조건을 얻을 수 있다는데? - 미국 스탠퍼드대 재커리 토말라 교수의 ‘잠재력 선호 실험’ ㆍ 가격을 협상할 때 적절히 재치 있는 유머를 곁들이면 원하는 결과를 얻어 낼 확률이 높아지는 이유는? - 미국 캔자스대 캐런 오킨의 ‘사회적 영향력을 가지는 기법으로서의 유머 실험’ ㆍ 가격을 협상할 때 구체적인 금액을 제시하는 게 유리한 고지를 점하는 효과적인 방법이라는데? - 미국 컬럼비아대 말리아 메이슨 교수의 ‘협상에서 정확한 금액 제시 효과 실험’ ㆍ 비즈니스에서 두 가지나 네 가지가 아닌 ‘세 가지’로 정리할 때 눈에 띄게 효과적일 수밖에 없는 심리학적 근거는? -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 수잔 슈 교수의 ‘마케팅에서 활용할 수 있는 ‘3의 마법’ 실험 소설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방성식, 서애라, 이밤, 이상욱, 이시경, 이한얼, 임재훈, 채이아 저 / 16,800원 / 스토리코스모스 소설가가 되기까지 경험한 삶의 경로를 진솔하게 담은 신예작가 8인의 에세이집이다. 다양하고 다채롭지만 괴롭고 적응하기 힘든 삶의 경로를 소설가가 되고 난 뒤에 돌아봄으로써 소설가가 반드시 재능만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는 생생한 작가탄생 리포트를 읽을 수 있다. 숱하게 많은 직장과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괴롭게 소설가의 길을 간 사람도 있고 물리적인 측면과 다르게 독특한 정신적 측면의 경로를 거쳐간 사람도 있다. 결국 이 세상의 모든 소설이 인간과 인생의 문제를 다룬다는 걸 감안한다면 그들에게 재능보다 우선하여 주어지는 삶의 경로가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를 단번에 간파할 수 있게 된다. 그토록 힘들고 괴롭고 적응하기 힘든 삶의 경로에서도 그들이 길을 잃지 않고 오늘에 이를 수 있었던 나침반이 바로 ‘소설’이라는 걸 알게 하는 책이다. ■ 소설가가 되는 데 필요한 건 재능이 아니다 이 책은 소설가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그들이 경험한 인생 경로를 통해 밝혀내고자 기획된 책이다. 갓 탄생한 소설가들, 아직 문학적 명성을 얻지 못한 채 힘들어하는 그들의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육성을 모아 놓으면 그 결과물에서 소설가가 탄생하는 데 필요한 진정한 공통분모가 발견되지 않을까 하는 궁금증, 그리고 그것을 면밀하게 분석해보면 소설가가 되고자 하는 심리적 경로와 물리적 경로 사이에서 소설가가 되어야 할 사람들에게만 프로그램된 일종의 운명적 코드 같은 게 발견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기획의 출발점이었다. 소설가의 일생은 크게 두 시기로 나뉜다. 소설가가 되기까지의 과정, 소설가가 되고 난 이후의 과정. 이 책에 수록된 신예 소설가 8명의 자전적 에세이는 당연히 소설가가 되기까지의 과정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등단이란 소설가에게는 새로운 탄생이자 새로운 출발이기 때문에 그 이후의 삶에 대해 초점을 맞추는 건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독자들이 이 책에 수록된 자전적 에세이를 다 읽으면 그들이 소설가가 되는 데 기여한 건 재능이 아니라 ‘삶의 경로’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 그 삶의 경로가 외관상으로는 본인들이 원하는 길을 간 것처럼 보이지만 어디에서도 안정과 평안을 얻지 못한 채 부유하고 방황하며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주변인의 삶을 살았다는 점에서 기이한 공통점을 드러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불안정한 삶의 경로를 거치면서도 무의식의 저 깊은 기저로부터 ‘소설을 쓰고 싶다’거나 ‘소설을 써야 한다’는 무의식적 강박에 시달렸다는 공통점 또한 드러내고 있다. 인생이 캄캄하게 느껴질 때마다 백지 창을 띄워놓고 토하듯이, 때로 싸우듯이 썼다. 남몰래 꿈꾸고 은밀하게 써왔다. 습작생이란 어쩐지 수험생이나 고시생과는 다르게 내놓고 말하긴 낯부끄러운 신분이니까. 주로 좌절된 꿈과 망한 사랑 탓에 방황하며 인생을 두고두고 망가뜨리는 애송이들의 이야기였다. (……) 돌이켜보면 그랬다. 나를 숱하게 망하게 했던 것들이 나를 쓰게 했다. 사랑이 망해도 망한 나는 남았으니까. -이밤 「사랑이 망하고 남은 것들」 일부 왜 하필 소설이었을까. 음악도 있고, 영화도 있고, 그림도 있는데. 그게 뭐든 소설보다 돈이 됐을 텐데. 모두가 더 좋아하고 관심을 가져줬을 텐데. 아버지에게 그런 눈빛을 받지 않아도 됐을 텐데. 그렇게 오랫동안 자신을 미워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이상욱 「나는 소설의 신을 만났다」 일부 직장 생활 십여 년 만에 실업급여라는 것을 받게 되었다. 고용복지센터가 안내해 준 총 수급 기간은 팔 개월이었다. 그사이 소설을 쓰면서 틈틈이 재취업 준비를 해보자고 계획을 세웠다. 다른 글을 쓸 수도 있었을 텐데 왜 하필 소설이었을까. 잘 모르겠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회사 생활을 하면서 알게 모르게 소설 창작의 욕구가 피어났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임재훈 「주변인으로서의 작가」 일부 인용 글에서 보다시피 소설가가 되기까지 저들이 겪은 삶의 경로는 순탄치 않고 안정적이지 않다. 하지만 그들은 무의식의 발로처럼 어려운 삶의 경로를 거치는 동안에도 소설에 대한 연결고리를 놓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경로가 한계치에 이를 때쯤 당선통지를 받고 소설가가 되었다. 그 순간의 기쁨과 희열을 어떻게 말로 형용할 수 있겠는가. ■ 소설, 인생을 버티게 하는 마지막 자존의 방패 경험해본 사람들은 누구나 알겠지만 당선 내지 등단이라는 것은 운전면허를 발급받는 것과 하등 다를 게 없다. 면허를 받고 운전을 하거나 말거나, 차를 사거나 말거나, 사고를 내거나 말거나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들이 소설가로 주목받을 수 있는 유일한 경우는 오직 한 가지, 그들이 좋은 소설로 세상으로부터 인정받게 될 때뿐이다. 그래서 온갖 심리적 물리적 굴곡을 거쳐 가까스로 소설가가 된 이후에도 그들은 불안정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불면의 밤을 지새우며 자신을 불사르는 것이다. 오직 좋은 소설을 쓰고, 오직 그것만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이 책에 수록된 자전적 에세이들을 통해 중요한 사실 한 가지가 도출된다. 소설가가 되기까지 저들에게 주어진 쉽지 않은 삶의 경로는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이 아니라는 것. 뿐만 아니라 삶의 경로에서 얻은 인생 경험이 의식의 밑거름이 되어 소설의 질료가 된다는 것. 요컨대 그들은 처음부터 타고난 작가적 재능이 있어서 소설가가 된 게 아니라는 것이다. 재능이 아니라 자신들을 견인하고 버티게 하는 무의식적 구원의 방패를 그들은 지니고 있었다. 내면의 가장 깊은 곳에 그 운명의 방패가 칩처럼 꽂혀 있어 위기가 올 때마다 버티고 지탱할 수 있게 해 준 것이다. 힘겹고 버거운 삶의 경로에서 쓰러지지 않고 무릎 꿇지 않을 수 있게 해 준 마지막 자존의 방패-그것이 바로 ‘소설’이었다. 소설가를 만드는 게 재능이 아니라 ‘삶의 경로’라는 걸 진지하게 되새겨보게 하는 책이다. 어린 심장 훈련 이서아 저 / 18,000원 / 문학과지성사 “나는 이 거리에 홀로 남아 있고 끔찍이 고독해요. 하지만 나는 매일매일 훌륭하게 살아남아요”
퀘스트가 난무하는 어른들의 세계를 평정하러 온
명랑 소녀들의 고군분투기어쨌거나 지구는 늘 지옥이었다. 나무는 절단당하고, 사람들은 초콜릿으로 폭식하며, 온 도시에 은빛 건물과 쨍한 스크린이 가득하다. 터널은 산의 몸통을 뚫고, 하늘에서는 설탕 비가 내리며, 스크린은 내 눈에 불빛 총알을 쏜다. -제21회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수상 소감에서 이서아의 첫번째 소설집 『어린 심장 훈련』이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2021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에 「악단」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한 그는 당시 “한동안 한국문학에서 자취를 감췄던, ‘질주하는 아이’ ‘무서운 아이’의 귀환”이라는 평을 받으며 문단에 “새로운 아이의 출현”(강동호)을 예고했다. 이후 꾸준히 활동하며 “동화와 누아르의 독특한 결합”(조효원)을 멈추지 않은 그가 등단작을 포함한 일곱 편의 소녀 이야기를 펼쳐 보인다. 이 소설집은 성숙한 어른이 되기를 능동적으로 거부하는 여자아이로부터 출발한다. 주변 어른들은 그 아이에게 ‘비정상’이라는 꼬리표를 붙이고 얌전히 규칙에 따를 것을 명령한다. 하지만 마치 어린 짐승 같은 소녀들은 어른의 세계에 편승하는 법이 없다. 오히려 “말처럼 거침없이 내달리면서도 총알처럼 정확하고 빠르게 표적에 꽂히며 독자에게 쾌감을 안겨준다”(김보경, 「런, 리셋, 리플레이」). 일곱 편의 소설에 등장하는 각각 다른 연령과 배경을 가진 ‘나’는 작품이 거듭될수록 성장한다. 이 과정에서 총ㆍ원숭이ㆍ새 등이 연결 고리처럼 배치되어 마치 한 편의 성장소설처럼 읽히는 것이 이 책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다. 작가는 현실에 놓인 퀘스트를 게임하듯 흥미롭게 수행해 나가면서 필요에 따라 다른 차원의 세계를 넘나들며 심장 강화 훈련을 멈추지 않는다. 이 용감하고 천진한 여자아이들의 ‘지옥에서 살아남기 위한 무한 질주극’으로 독자들을 초대한다. “지금 당장 검은 말 한 마리를 상상하시라. 그것도 맹렬히 달리는 놈으로”통제 불가 일곱 아이의 심장 훈련법 『어린 심장 훈련』 속 여자아이들은 자기를 즐겁게 하거나 불행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본능적으로 파악한다. [……] 위계질서와 명령, 괴롭힘, 폭력에 굴하지 않으며, 자기를 구속하는 세계로부터 탈주하며, 자기 혹은 사랑하는 대상을 괴롭힌 이들을 응징하는데─비록 응징에 실패하더라도─거리낌이 없다. ─해설「런, 리셋, 리플레이」에서 『어린 심장 훈련』에 나타나는 비극적 세계관은 대개 ‘보호자’라 불리는 가까운 인물들이 아이를 억압하거나 떠나가면서 시작된다. 어린 주인공은 같은 시선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또래 혹은 다른 어른과 함께 상상인지 현실인지 구분되지 않는 무대 위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저마다의 총을 움켜쥔다. 「검은 말」속 ‘나’는 부모와 함께 고모부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에 사는 ‘고모’의 저택에 방문한다. 비행기 안에서 죽을 듯한 공포감을 느낀 ‘나’는 부모를 곤란하게 만들 정도로 한바탕 소동을 벌인다. 고모의 집에 도착 후 저택 밖으로 펼쳐진 광활한 대지와 저택 안에 놓인 ‘검은 총’에 매료된다. ‘나’는 상상력이 풍부한 어린 소녀를 편견 없이 바라봐주는 고모와 긴밀한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고모가 그린 도면과 선택지가 나열된 퀴즈 형식의 질문지는 의뭉스럽게 보이지만 이후 ‘나’가 스스로를 돌아보고 글을 쓰게 하는 방아쇠가 된다. 「서울 장미 배달」은 상처 가득한 심장을 가진 이들이 조금씩 자신의 무대를 찾아가는 이야기다. 과거 ‘어머니’가 힘들게 구한 입장권으로 서커스를 관람했던 ‘나’는 원숭이 ‘망고’와 눈이 마주쳐 비명을 지르듯 우는 바람에 어머니와 함께 서커스장에서 쫓겨난다. 그리고 이러한 자신이 평범하지 않은 아이이며 부모에게 짐이 된다고 생각한다. 심리 상담소를 다니던 ‘나’는 어느 날 그곳을 탈출해 발레 학원 수강생들을 구경하다가 “내가 너라고 불러도 화를 내지 않은 유일한” 사람, ‘리혜’를 만난다. 부잣집 딸로 우아하게 발레를 하는, 자신과 많이 다른 모습의 리혜와 가까워지고 그녀의 죽은 오빠 사진을 본 뒤에 ‘나’는 그들에게 친숙함을 느낀다. 「초록 땅의 수혜자들」의 아이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폐공장에 모여 살며 서로를 지키기 위해 의기투합한다. ‘나’보다 한참 언니인 ‘진희’는 공장의 사수였던 ‘선영’의 시체가 든 관을 훔치는가 하면 ‘나’를 성추행한 ‘공장장’ 그리고 아이들을 협박하는 ‘예술가’를 응징할 만큼 용감하다. 정체 모를 총성 소리가 난무하는 마을 속 폐공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나’와 선영은 마치 게임처럼 복수 대상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트럭을 돌진시킨다. 「빨간 캐리어」는 탈주를 거듭해도 끝나지 않는 고통을 새로운 차원의 형식을 빌려 그려냈다. ‘나’는 카지노의 골프장에서 일하는 캐디다. 엄격한 규율 속에 인격 모독이 만연해 있는 골프장은 죽더라도 새로운 몸에 영혼을 갈아 끼우고 아침이 되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일하게 하는 곳이다. ‘707호 캐디’와 카지노에 놀러 간 날, 그곳에서 ‘나’는 거대한 모니터 속에 갇힌 AI가 또 다른 ‘나’라는 것을 발견한다. ‘나’를 괴롭힌 고객들을 공으로 만들어 호수에 빠뜨리던 놀이가 상상이 아니었음을 깨달은 ‘나’는 골프채를 쥐고 그곳에서 탈출할 결심을 한다. ‘어린 심장’을 가진 소녀들이 성장통을 겪는 과정은 험난하다. 저마다 무기를 들고 달려가지만 지옥에서 탈출하기는 쉽지 않고 더 크게 울부짖을 뿐이다. 그러다 자신을 구원해줄 신과 통화하고 싶어 수화기를 들기도 한다(「초록 땅의 수혜자들」). 이 어린 심장의 주인인 ‘어린아이’는 악당에게 당해도 복수하면 되고 노력하면 지옥에서 탈출할 수 있다는, 무모한 믿음과 무한한 상상력을 가지고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 단단해진 마음으로 자신을 지키며 자유로워지는 어린 심장의 아이들.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들며 울더라도 총구를 겨눌 줄 아는 이서아식 세계에서 무럭무럭 자라나는 이들에게 매료되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이게 내가 사는 방식이었다. 이렇게 살 때에만 나는 진실로 살아 있었다”내일의 ‘예쁜 인생’을 위한 오늘의 퀘스트 달성하기 『어린 심장 훈련』에는 작가가 던져놓은 퀘스트들이 계속해서 등장한다. 이야기를 글로 옮겨 적을 때 지루해서는 안 되고(「검은 말」), 학교에 불을 지르되 산과 동물들을 해쳐서는 안 되며(「악단」), 친구를 앗아간 물속에 잠기되 반드시 안전하게 복귀해야 한다(「푸른 생을 위한 경이로운 규칙들」). 이 임무들은 소설 속 어른들이 아이에게 요구하는 것과는 다르다. 현실 세계의 차별과 규율, 부조리와 부당함으로부터 자신을 비롯한 사랑하는 모든 것을 지키기 위한 장치인 것이다. 주인공은 나름의 소신을 가지고 명랑하게 주어진 미션을 하나씩 수행해 나간다. 「사하라의 DMZ」의 배경은 선 작품의 인물들이 힘들게 싸워 당도한 곳이 사막 한가운데임을 암시하듯 펼쳐진다. ‘나’는 친구 ‘바스마’와 함께 가이드의 차를 타고 둘만의 여행을 즐길 수 있는 ‘프라이빗 투어’를 떠난다. 그 여행길의 사막 한복판에서 ‘아말’이라는 의문의 여성을 만난다. 그녀는 자신의 동생이 죽어가고 있다며 차에 태워달라고 부탁한다. 한국인인 ‘나’를 조롱하던 가이드는 차에 탄 아말에게도 무례하게 굴고, 참지 못한 아말이 가이드를 향해 총구를 겨눈다. 이 위험한 상황에서 ‘나’는 깨달음을 얻은 듯 말한다. “누군가 반드시 총을 쥐어야 한다면, 그건 내가 되어야 했다.” 이 소설집의 마지막 작품인「푸른 생을 위한 경이로운 규칙들」속 ‘J’는 ‘나’에게 더는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게 해준 “어른 같지 않은” 어른이다. 그는 수영장에 함께 다니고 동고동락할 만큼 ‘나’와 가까운 사이었지만 ‘나’와 사이가 멀어진 이후 큰 홍수로 세상을 떠난다. 생전 그는 내게 이런 메시지를 보냈다. “글 열심히 써./따뜻하고 좋은 글을 써야 한다./예쁜 인생 살아라.” 이후 ‘나’는 스쿠버다이빙을 배우며 수면 아래에서 죽음과 삶을 생각한다. 이 지옥 같은 세계를 벗어나기 위해 숱한 임무를 수행해왔지만 여전히 제자리라고 느끼던 ‘나’는 상상 속에서 J와 함께 퀘스트를 하나 더 만들어낸다. “너는 아직 어리니까 행복하게 살 수 있어./달리는 열차도 막아 세울 기세로/이 지옥 같은 삶을 벗어나야 한다.” 그러고 나서 생전의 그가 망망대해 속에 숨겨둔 소중한 것을 꼭 품에 안은 채, 죽지 않고 물 밖으로 나가리라 다짐한다. 이 소설집에는 나름의 목표를 설정하고 하나씩 수행해 나가는, 목표를 달성했다면 그다음 목표를 설정하고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소녀들이 있다. 그리고 지난한 과정을 일종의 게임처럼 경쾌하게 뛰어넘는 재기발랄함과 목표를 향해 내달리는 파괴적인 에너지로 이루어진 이서아식 세계가 있다. 드디어 어른이 되었으나 여전히 어린 심장들을 위해 『어린 심장 훈련』 퀘스트가 우리 앞에 찾아왔다. 이제 나다운 나, “예쁜 인생”을 찾기 위한 미션을 수행할 시간이다. 정오에서 가장 먼 시간 도종화 저 / 11,000원 / 창비 깊은 흑요석 같은 시간을 만나게 하여주소서
내 안의 어두운 나를 차분히 응시하게 하여주소서
격랑의 복판에서 오롯이 고결한 영혼, 한국 서정시의 거목 도종환
기도하는 마음으로 써 내려간 시력 40년의 역작 한국시단을 대표하는 서정시인으로서 올해 등단 40주년을 맞이한 도종환의 열두번째 시집 『정오에서 가장 먼 시간』이 창비시선 501번으로 출간되었다. 세월호 참사의 아픔을 보듬는 “격렬한 희망”(박성우, 추천사)의 시로 먹먹한 감동을 선사한 『사월 바다』(창비 2016) 이후 8년 만에 펴내는 뜻깊은 시집이다. 시인은 3선 국회의원이자 문화체육관광부장관으로 현실정치에 투신하는 동안 “전쟁 같은 일상”을 살아온 “고뇌의 흔적들”(시인의 말)을 진솔한 언어로 토로한다. 동시에 자연을 사랑하는 한 인간으로서 삶에 대한 진지한 반성을 순환하는 계절의 흐름에 실어 섬세하고 정갈한 목소리로 들려준다. 오랜 시간 맑고 투명한 시심을 잃지 않은 시인의 견결한 마음이 뭉클하게 와닿는다. 특히 연륜과 내공이 엿보이는 단형시의 아포리즘은 서정의 진수를 보여주는 한편 시집의 품격을 높인다. 나와 다른 것을 혐오하는 세태, 거친 분노의 언어가 들끓는 어둠의 시대 정중앙에서 시인은 알베르 까뮈가 말한 ‘정오의 사상’을 소환한다.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중용을 추구함으로써 흔들리지 않는 조화, 즉 정오에 다다르게 된다는 사상이다. 정치와 시, 도시와 자연. 절대 맞닿지 않을 듯 보이는 양극에 동시에 발 디딘 채 자신을 혹독하게 다그치며 마음을 정순하게 가다듬어온 시인의 귀한 깨우침이 적확하고 미려한 시편들로 화한다. 그리하여 오늘날 부조리한 세상을 꾸짖는 그의 노성이 장엄하다. 자연 앞에서 자신을 겸허히 낮추며 깨우침을 희구하는 기도는 감미롭다. 정신적 내전 상태에 다다른 현대인에게 “순결한 정신주의자의 고뇌”로 읽힐 이 시집은 “마음의 쓴 약”과 “회초리”(안도현, 추천사)가 되어 잔잔하지만 묵직한 울림으로 가슴 깊이 퍼질 것이다.
정세의 소용돌이 속에서 되새기는 역사의 가르침
전작과 마찬가지로 이번 시집에도 시인과 정치인이라는 두가지 정체성과, 거기서 비롯되는 경험이 오롯이 담겨 있다. “시 쓰다 말고 정치는 왜 했노?”라는 물음에 시인은 “세상을 바꾸고 싶었”(「심고(心告)」)다고 순정한 마음을 고백한다. 또한 역사를 통찰하는 격조 높은 비유로 우리가 곱씹어볼 고민거리들을 던진다. 조선시대 사림(士林)의 정계 진출을 돌이켜보자. 큰 뜻을 품은 성리학자들이 선조 치하에서 정권을 잡았지만 이내 붕당 간의 소모적인 반목이 심화되고, 외세의 침략까지 맞이한 조선은 심대한 위기에 처한다. 급기야 처절한 징비(懲毖)의 기록을 후세에 남겨야 했던 사림의 실패를 시인은 작금의 현실에 대입한다. “꿈꾸던 세상이 오리라던 믿음”은 무너지고 “수백년 적폐를 단 몇해에 바로잡는 게/얼마나 지난한 일인지” 뼈저리게 깨닫는다. 어째서 “나라가 그 지경이 되었는지”(「사림」)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묻는다.이때 “오해의 화살”에 맞고 “비난의 칼날에 베여 비통해”(「새해」)할지언정 “적개심으로 무장한 유령들”(「정오에서 가장 먼 시간」)을 탓하지 않는 시적 화자의 모습은 눈길을 끈다. 그는 깊이 절망하면서도 “성정이 남루해지는 건 오히려 제가 아닌가”(「속유(俗儒)」) 자문하며 반성한다. 밤하늘의 별을 올려다보며 “내 안의 어두운 나를 차분히 응시”(「정오에서 가장 먼 시간」)하는 장면에는 존재의 본질을 꿰뚫는 신령한 기운마저 서려 있다. 이 가없는 참회의 어둠 속에서 길 잃은 ‘나’를 이끌어주는 것은 이치를 탐구하고 백성의 안위를 염려하며 ‘기본’에 충실했던 옛 성현의 가르침이다. ‘나’는 다산 정약용, 퇴계 이황 등 위대한 스승들을 떠올리며 격물치지(格物致知), 이용후생(利用厚生), 경세치용(經世致用)과 같은 유학의 정신을 읊조리고 흔들리는 마음의 중심을 잡는다. 번뇌와 좌절을 딛고 역사의 교훈과 초심을 치열하게 좇음으로써 간곡하고 간절하게, 정오의 도래를 주문하는 것이다. 혼탁한 세상을 정화하고 어지러운 마음을 추스르는 시 이번 시집 곳곳에 담긴 아름다운 자연물은 감상의 대상보다 반성의 매개체이자 삶의 지향에 가깝다. 시인은 온갖 모욕과 증오가 난무하는 도시에서 부대끼느라 피폐해진 심신을 자연에 의탁하여 “죽음과 영원한 삶의 이치 밝게 꿰뚫어보는/깊은 지혜”(「이단」)를 얻는다. 예컨대 “나무 가득 꽃 피워놓고/교만하지 않는 백매화”(「꽃나무」)를 보며 절제와 겸허의 미덕을 배우고, “자신에게 오는 모든 순간순간을/받아들일 줄”(「가을 나무」) 아는 나무의 미덕에서 자연의 섭리에 따르는 삶의 경건함을 깨닫는다. 시적 화자가 자연으로부터 느끼는 감정은 숭고함에 가깝다. 그에 비한다면 인간의 마음은 한없이 초라하지만, 그 초라함마저 숨기지 않고 털어놓음으로써 시인은 독자들에게 공감의 자리를 내어놓는다. “혼탁한 물”과 “퀴퀴한 냄새에 휩싸인” 가로수를 바라보며 자신 또한 “도시로 불려 나와 산 지 오래되었”(「도시 장미」)다고 말하는 담담한 문장이 씁쓸하게 읽히는 까닭이다. 그러나 흙먼지 덮어쓴 가로수라 한들 나무가 아닐 수는 없다. 시인도 마찬가지다. 세속의 때가 자욱한 곳에 거한들 가슴에 자연을 품은 이상 시인은 시인이 아닐 수가 없다. 그렇기에 이 무겁고 “사나운 운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사의재(四宜齋)」) 다짐한다. 거센 태풍과 노도에 맞서는 이 인생이라는 항해가 “치열하고 절박한 생의 시간으로 축적”(「출항」)되리라 믿고 몇번이고 다시 출항을 결심한다. 역경 앞에서 삶의 의지를 더욱 굳건히 하는 묵묵한 자세에서 우리는 도종환 시의 심원한 내력을 확인할 수 있다. 불의의 시대를 함께 건너는 따스한 동행 전쟁 같은 삶을 살면서도 시인은 “세속의 길과/구도의 길이 크게 다르지 않다”(「풀잎의 기도」)는 믿음을 간직하며 온유함을 잃지 않는다. ‘부드러운 직선’처럼 섬세한 감성과 올곧은 선비정신을 동시에 가꾼다. “제비꽃 애기똥풀 같은 꽃만 보아도 마음이 순해지고”, “잘하는 것보다 못하는 게 더 많고/세상에는 나보다 훌륭한 사람이 많다는 걸” 명심하며, 늘 몸을 숙여 세상의 낮은 곳에 온기를 나눈다. 고달프고 외로운 이들에게 “하루를 잘 살아내는 일이/가장 큰 복수”(「숲을 떠나온 지 오래되었다」)라고 진정어린 위로를 건네기도 한다. 이번 시집을 통해 시인이 그늘진 인생의 골목길에 밝힌 “사랑과 연민의 초”(「대림(待臨)」) 옆에 나란히 서보자. 사계절이 무상하듯 자정의 암흑도 언젠가 걷히기 마련이다. 가녀린 촛불 하나도 언젠가 “칠흑 같은 세상”(「전야」)을 밝힐 무수한 촛불이 되고 끝끝내 정오의 햇살로 세상을 비출 것이다.
LOVE SOMEBODY 러브 섬바디
C. R. 로섹 저 / 김수민 역 / 17,000원 / 폭스코너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서 자신이 알던 세상이 완전히 뒤바뀔 때,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의 의미를 감각적으로 담아낸 하이틴 삼각 로맨스 성장소설! 사랑에 빠지면 자신이 알던 세상이 뒤흔들리는 경험을 하게 된다. 특히 그 사랑이 예상치 못한 변화와 도전을 요구할 때는 더욱 그렇다. 《러브 섬바디》는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인해 자신이 이제껏 알던 세상이 온통 뒤흔들리며 변화와 결단을 요구받는 세 청춘 남녀의 삼각 로맨스와 성장을 다룬 소설이다.
노스이스턴 고등학교의 축구 스타이자 인기남인 크리스천은 전 여친이자 현 절친인 샘이 기획한 연극에 억지로 참여해 연기를 하던 중, 관객석에 앉아 있던 로스에게 한눈에 반하고 만다. 그 때문에 야심 만만한 샘이 정성 들여 준비한 마지막 대사를 망치고 만다. 정작 로스는 지역 예술 잡지의 기자 자격으로 관람한 샘의 연극이 멍청하기 짝이 없다고 생각하는 중이다. 로스는 연극을 혹평하는 리뷰를 게재하고 그 기사를 읽은 샘은 분개하는데, 심지어 학기 말에 예정된 학교 전통 행사인 벨레로즈 연설자로도 로스가 선정되자 로스에 대한 복수심이 차오른다. 그런 사정도 모른 채 크리스천은 로스와의 데이트를 갈망하지만, 스포츠광에 전형적인 인싸인 크리스천과 달리 로스는 책과 예술을 사랑하는 자발형 외톨이이다. 자기만의 벽을 둘러치고 주변에 찬바람까지 풍겨 얼음공주로 통하는 로스와의 접점을 도무지 찾지 못한 크리스천은 전 여친 샘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샘은 로스에 대한 복수를 위해 크리스천의 연애를 돕는다. 샘은 크리스천을 대신해 로스에게 보낼 메시지를 작성하고, 로스의 마음에 들 만한 행동을 크리스천에게 지시하면서 연애감정을 조작한다. 덕분에 로스와 크리스천은 조금씩 가까워지지만, 이 왜곡된 삼각관계는 예상과 달리 미묘한 방향으로 흘러가는데…. 과연 이 연애는 해피 엔딩을 맞을 수 있을까? 주인공 세 남녀는 각자 자기만의 문제를 안고 있다. 크리스천은 모두에게 사랑받는 최고의 인기남이지만, 강압적인 부모와 집을 나가버린 형이 있는, 아픈 가정사를 갖고 있다. 게이 아빠가 대리모를 통해 낳았다는 특이한 출생 이력을 가진 로스는 지적인 환경에서 다정한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지만, 남들과는 다른 배경 때문에 오히려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있다. 샘은 야심과 자신감으로 똘똘 뭉친 학교의 스타이지만, 자신을 버리고 할리우드로 가버린 영화배우 엄마 때문에 실패에 대한 강박적인 두려움을 내내 품고 있다. 어쩌다 시작된 가벼운 연애가 그들의 내면 깊숙한 곳의 문제들을 드러내고, 정체성과 익숙한 세계를 온통 흔들어대는데, 그렇다면 그들은 그 사랑으로부터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에드몽 로스탕이 쓴 연애소설의 고전 《시라노》의 현대판 하이틴 퀴어 버전이라 할 수 있는 이 작품은 예상치 못한 전개와 번뜩이는 유머, 기발한 반전과 현대적인 시대 감각을 담고 있는 흥미진진한 로맨틱 코미디이자 세 청춘 남녀의 성장과 도전을 담아낸 성장소설이다. 사랑의 복잡함을 달콤하게 풀어낸 이 소설은 생각을 자극하는 깊이도 갖추고 있어 로맨스소설 특유의 상큼 발랄한 재미와 성찰적인 여운을 두루 선사하는 작품이다.
발룬티코노미스트
한익종 저 / 16,800원 / 여성경제신문 수상내역/미디어추천 세계 인류문화유산 지정 ‘제주 해녀’를 만나
발룬티코노미스트 삶을 추구하다! 우리가 잊고 살았던 당연한 것을 일깨우는 통찰
쓰고 버린 나무젓가락을 부러뜨려 그린 제주 해녀 그림 58편과 함께 욕심을 내려놓고 인생의 맛을 알게 해준 해녀들의 애잔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인생 후반부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나 혼자만을 위해 투쟁하고, 경쟁하며 사자와 같은 삶을 살며 쟁취한 것들이 덧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함께 가는 인생길. 발룬티코노미스트의 삶이 답이더군요.” 욕심을 내려놓고 인간과 자연을 생각하며 ‘함께’하는 삶을 추구하는 삶을 위해서는 봉사란 의미의 ‘발룬티어’와 경제활동을 하는 사람이라는 ‘이코노미스트’가 합쳐진 ‘발룬티코노미스트’로서의 삶을 제안하는 작가의 자전적 에세이, 《발룬티코노미스트》 자타가 공인하는 이슈메이커이자 괴짜 작가 한익종. 삼성그룹 회장 비서실에서 시작해 삼성화재를 끝으로 인생 2막 마무리. 인생 3막은 내 손으로 집짓기, 폐가 고쳐 살기, 나무젓가락으로 해녀 그림을 그리며 산다! “인생 전반부(인생 1막, 2막)는 사자와 같은 투쟁적 삶을 통해 돈, 명예, 지위, 권력을 추구했다면 인생 후반부, 즉 인생 3막은 자아실현과 사회적 기여를 통한 자존감의 유지를 추구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제주 해녀의 삶을 부러뜨린 나무젓가락에
먹을 묻혀 골판지에 그리는 행위20여 년 전 어느 날, 제주 작은 어촌마을에서 만난 구부정한 허리의 제주 해녀. 왜 그리 가슴 짠하게 아름다웠을까. 그 모습을 보고 짝사랑에 빠진 작가. 시간은 다시 흐르고 5년 후, 직장을 은퇴하고 인생 2막을 시작하며 본격적으로 제주 해녀에게 푹 빠진다. 그리고 그는 해녀를 인생 3막 멘토로 삼는다. 그는 해녀의 모습만이라도 곁에 두고 싶었고 어떻게 기록할까 고심에 빠졌다. 어느날 중식당에서 식사를 하다가 무심코 쓰다 버린 나무젓가락을 부러뜨려 냅킨에 짜장면 국물을 찍어서 그림을 그려봤다. 아! 바로 이거다. 해녀의 투박하면서도 거친 삶을 표현하기에 이보다 알맞은 표현 도구가 있을까? 이날 이후 그는 여기저기 버려진 나무젓가락을 주어다 부러뜨린 뒤 먹을 찍어 역시 버려진 골판지에 해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혹자는 왜 해녀를 버려진 나무젓가락으로 골판지에 그리느냐고도 했다. 그는 남루한 생활, 죽음을 무릅써야만 하는 물질, 세상이 업신여기고 보잘것없이 대접하던 해녀의 삶에서 유네스코 인류문화유산으로 꽃 피게 된 오늘을 보았다. 그런 삶을 표현내기에 버려진 나무젓가락과 수명을 다한 골판지야말로 환상적 도구였다. 버려지고 홀대 받는 존재 속에서 희망의 빛을 끌어내는 작업이었다. 작가는 욕심을 내려놓고 인간과 자연을 생각하며 ‘함께’하는 삶을 추구하는 발룬티코노미스트 삶을 말한다. 발룬티코노미스트란 작가가 만든 신조어다. 봉사와 경제활동을 하는 사람을 합친 말이다. 우리네 인생 전반부가 사자와 같은 투쟁적 삶을 통해 돈, 명예, 지위 권력을 추구했다면 인생 후반부는 자아실현과 사회적 기여를 통한 자존감의 유지를 추구해야 하지 않을까? 성과지상주의적 삶에서 앞만 보고 달리다가 지치곤 한다. 그럴 때 갈 곳을 잃고 우두커니 서서 먼 곳을 응시한다. 보다 큰 목표, 보다 큰 성공만을 좇다 보니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닐까? 고개를 들어 눈앞에 펼쳐진 제주 해녀 이야기를 들어보자. 오늘도 거친 파도를 건너 물속으로 자맥질하는 그네들의 삶에서 무언가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삶의 지혜를 멘토 제주 해녀들에게서 얻었다. 제주 해녀의 삶을 통해 깨우침을 얻었다. 그 어떤 철학자보다도 인생의 철학자인 해녀. 그네들은 우리가 당연히 잊고 사는 것에 대한 가치를 일깨운다. 그저 자기 할 일을 묵묵히 해낼 뿐인 태도에서 배운다. 실은 그것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일이라고. 아주 쉬운 말로 제주 방언으로 잠언집에서 마주할만한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툭 뱉어낸다. 작가는 해녀들의 지혜를 그림과 말로 전한다. 책의 왼쪽에는 작가 시점, 오른쪽은 해녀 시점의 글을 담았다. 왼쪽 페이지에서 작가는 그가 직접 마주한 인생 3막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를 이야기한다. 오른쪽 페이지에서는 해녀가 오늘의 물질을 이야기한다. 무엇을 어떻게 했다 자랑하지 말고 앞으로 무엇을 왜 해야 하는지를 말하는 사람이 되기를, 지나온 날들로 또 다른 나만의 세계를 꿈꾸지 말고 앞으로의 날들을 함께 살아 갈 얘기들로 채우는 삶이 되기를 작가의 말을 빌어 우리 앞날이 어떻고, 어때야 행복하다고 확신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과거의 욕심에서 벗어나 ‘함께’ 간다면 어떤 두려움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아직도 가지 않은 길이 있다. 그렇게 지난날의 경험과 족적만으로 삶을 다 규명할 수 없다. 앞으로의 삶이 또 뒤죽박죽, 좌충우돌의 삶이 될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충분히 행복하게 헤쳐 나갈 거라는 확신이 있다는 점이다. 바로 해녀의 삶에서 ‘욕심을 내려놓고 함께’라는 삶을 대하는 태도를 배웠기 때문이다. 오늘 물질할 때가 제일 행복하다는 그네들은 물질은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일생의 업을 통해 깨우쳤다. 해녀들은 알고 있다. 저 멀리, 더 깊이, 더 욕심을 내면 오늘 물질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렇기에 욕심내지 않는다. 물질 수확이 줄어들었더라고 오늘 이만큼이라도 잡을 수 있다는 것에 안도한다. 어제 물질 다르고, 오늘 물질이 다르고, 또 내일 물질은 어찌 될지 몰라도 물질에 충실하다. 동료 해녀와 함께라면 컴컴한 물속도 두렵지 않다. 그런데 함께하던 해녀 동료들이 더 이상 물질을 못 한다. 어느새 해녀 무리를 이끌던 해녀 대장님은 쇠잔해 가는 몸을 이끌고 물질 나온 우리가 안쓰러워 바닷가로 마중 나온다. ‘언젠가 나도 물질을 못 나가겠지?’ 마음이 무거워지다가도 오늘 망사리를 채울 수 있음에 감사하다. 동료 해녀의 숨비 소리에 행복하다. 봄날, 숨비 노래를 함께 부르며 또 물속으로 들어간다. 오늘 잡은 것이 별로 없어도 큰 걱정은 안 한다. 요 며칠 잡아 놓은 게 꽤 되니까. 다음 물질에는 많이 잡는다는 희망이 있기에. 현재에 만족하고 내일을 기대하며 살아가는 해녀들의 삶. ‘카르페 디엠’이란 이를 말하는 게 아닐까? 어제는 심술을 부리던 바다가 오늘은 잔잔하다면 바다가 나를 품어준다고 기분 좋다고 말하는 해녀. 그네들은 기분 좋은 바다, 기분 좋은 물질, 기분 좋은 망사리면 만족한다. 오늘도 물때 맞은 이른 아침 물질을 나가는 해녀의 뒷모습에서 삶의 향연이 펼쳐진다.
기후 변화가 전부는 아니다
마이크 흄 저 / 홍우정 역 / 16,800원 / 풀빛 “지구 온도 내리기와 탄소 중립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을까?”
정치적 시야를 협소화시키고 환원주의적 사고에 갇히게 하는 ‘기후주의 이데올로기’
극단적인 기후 정치와 왜곡된 기후 과학의 위험에서 벗어나게 해 줄, 기후 변화에 대한 날카롭고 도발적인 담론 하루가 멀다 하고 보도되는 대규모 산불과 대홍수, 심각한 가뭄 등 극단적인 기후 변화 뉴스를 볼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뒤이어 펄펄 끓는 지구 온도를 내리기 위한 행동 촉구와 탄소 중립을 위한 실천이 언급되고, 우리는 다시금 기후 위기를 초래한 인류의 한 구성원으로서 죄책감을 느끼곤 한다. 지구 온도가 올라 지구가 끝나기까지 ‘〇년밖에’ 남지 않았다는 종말론적인 기후 위기 문제 앞에서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게 되었다. 어느새 기후 변화는 인류의 모든 사안들과 연결되어 그 자체로 전부가 되었다.
시리아 내전, 대형 산불, 우크라이나 침공까지
모든 게 ‘기후 변화’ 탓이라는 그럴듯한 핑계기후주의는 우리 미래를 옥죄일 힘을 어떻게 얻었는가 최근 인류는 기후 변화, 기후 위기와 싸워 왔다. 정치인과 운동가뿐만 아니라 유명인과 연예인까지 나서서 뜨거워지는 지구를 ‘구하기’ 위해 ‘기후 변화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사람들의 행동을 촉구했다. 그런데 홍수나 가뭄 같은 기상 현상 외에 전쟁이나 사회 문제 역시 기후 관점으로 접근하는 흐름이 나타났다. 한 예로, 2011년에 시작되어 12년 간 약 5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시리아 내전의 원인을 두고 〈시리아 테러 사태의 발단은 기후 변화〉라는 식의 언론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고,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버락 오바마 역시 “기후와 관련된 가뭄이 내전으로 비화한 시리아의 초기 불안을 부채질했다”고 주장하는 등 다양한 정치 집단들이 기후 변화가 시리아 내전의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는 논지를 펼치기 시작한 것이다. 기후 변화로 인해 발생한 심각한 가뭄 때문에 시리아의 농민 노동자들이 터전을 잃었고, 그들이 도심지로 모여들면서 정치적 불안을 야기했다는 이유다. 심지어 장 클로드 융커 유럽위원회 위원장은 유럽에 들어온 시리아 난민들을 ‘기후 이민자’ 또는 ‘기후 난민’이라고도 불렀다. 이러한 식의 틀짜기(framing)는 관련자들이 기후 변화라는 인과적 서사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적용하여 논점을 돌리는 데 사용되었다. 그리고 이런 사고와 논리의 흐름이 가진 호소력 덕분에 최근 반박이 어려울 정도로 급격하게 확산되고 있다. 약 십여 년 전부터 이러한 식의 ‘기후 환원주의’의 결함과 위험성에 대해 지적해 온 저자는 이 책을 통해 기후 환원주의의 새로운 변종, 즉 ‘기후주의(climatism)’ 이념의 출현을 알린다. 기상 현상이 역사적ㆍ사회적ㆍ정치적ㆍ문화적ㆍ경제적ㆍ생태학적 체계와 상호작용하는 방식에 따라 성립된다는 맥락을 무시하고 오로지 ‘기후 변화 억제’의 정치에만 관심을 집중시키는 행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은 기후주의는 여타 이념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세상을 보고 해석하는 방식에 색을 입히는 색안경과 같다. 이미 공공 생활의 많은 영역에 만연한 기후주의는 그렇게 힘을 얻었고, 그에 도전하는 것은 기후 변화를 인정하지 않는다거나 가장 중요한 것이 된 기후 문제에 의문을 품는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 그렇게 기후주의는 우리의 미래를 쪼그라들게 만들고 있다. 기후 변화가 운석 충돌과 맞먹는 재앙이라는 공포 정치와 지구의 미래를 우리가 통제할 수 있다는 기후 과학의 환상이 만들어 낸 극단적이고 종말론적인 기후주의의 매력 지구 종말을 풍자한 영화 〈돈 룩 업(Don’t Look Up)〉은 지구를 향해 다가오는 혜성과의 충돌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학자들의 이야기다. 과학자들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은 지도자들 때문에 지구는 종말에 이르는데, 감독은 이 영화가 기후 변화로 인류가 맞닥뜨린 실존적 위협을 다룬 우화임을 밝혔다. 영화에 따르면 기후 변화는 마치 운석 충돌처럼 단번에 지구를 멸망시킬 ‘재앙적인 사건’이다. 그리고 동시에 과학자들의 말을 듣기만 했다면 해결할 수 있었을 ‘간단한 문제’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기후주의가 가진 고약한 매력과 문제점을 알 수 있다. 기후 변화는 운석 충돌처럼 극적인 위협이 아닌 훨씬 더 복잡하고 더딘 문제다. 저자는 현재 인류가 겪고 있는 기후 문제에 대한 복잡함과 힘듦을 포괄적이고 일관적이며 설득력 있는 거대 서사로 단번에 설명할 수 있다는 이러한 점이 바로 기후주의의 덫이자 매력이라고 말한다. 특히 기후주의는 다른 이념들과 다르게 과학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특수한 권위와 지위를 받는다. 저탄소 기술이 화석연료가 이룬 편리를 금세 대체할 수 있고 인류의 기술이 지구의 기후를 손쉽게 통제할 수 있다는 환상을 대중에게 심어 준다는 점에서 호소력을 가진다. 더구나 ‘지구를 지키려는 자’와 ‘지구를 파괴하는 자’로 손쉽게 선악을 구분하는 기후주의의 이원론적 관점은 자신들의 이익에 기후 변화 문제를 활용하는 일부 정치당국과 시민 활동가 등의 수혜자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극단적이고 종말론적일수록 기후주의의 매력과 영향력이 커지는 이유다. “이때를 놓치면 너무 늦습니다” 시간 부족 담론에 쫓기는 인류 단일한 목표만 좇는 정치적 시야의 협소화 기후 위기는 다른 위기들과 비교되어 다뤄져야 한다 그렇다면 종말론적인 기후주의는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을까? 종말론적 입장은 대중의 관심을 끌고 집단 정체성을 만들어 정치 활동을 촉진하는 데 효과적일 수 있다. 하지만 도리어 공포감과 두려움, 체념을 불러일으키는 역효과를 낳기도 한다. 매일매일 쏟아지는 기후 위기 콘텐츠와 카운트다운을 향해 똑딱거리는 기후 위기 시계의 위협 속에서 지구가 이른바 ‘되돌릴 수 없는 지점’을 향해 가고 있다는 시간 부족 담론은 특히 젊은 세대에게 불안감과 무력감을 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기후 변화를 막을 수 있다는 수많은 ‘마지막 기회’들은 실질적 변화를 꾀하려는 노력을 억누를 위험도 있다. 사실상 2006년 당시 영국의 토니 블레어 총리가 언급한 ‘기회의 창’부터 2017년의 기후 과학자 한스 요아힘 셸른후버의 ‘결정적 시기’, 2019년의 영국 찰스 왕세자의 ‘결정적인 창’으로 표현된 기회들은 이미 지나갔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이미 끝장난 시간’에 살고 있다. 이런 극단적인 담론들은 대중의 냉소를 불러오며 쉽게 인류의 미래를 종결시키고 결국엔 공공 정치의 목을 조르고 만다. 저자는 기후주의가 초래하는 ‘시야의 협소화’도 지적한다. 화석연료를 대체할 바이오연료를 생산하기 위해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에 팜유 농장을 확대했는데, 이는 도리어 원주민들의 생계를 위협하고 서식지와 생태계를 파괴하는 결과를 낳았다. 기후 변화를 막기 위한 바이오연료의 바람직성을 평가할 때 다른 사안들을 고려하지 않은 협소한 시야 탓이다. 이처럼 기후주의는 하나의 정책이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훨씬 더 넓은 시스템의 일부라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벼랑 끝’은 없다 지구가 끝장난다는 공포를 넘어 대응으로 가야 하는 이유 기후 변화가 전부는 아니기 때문이다 저자는 자칫 자신이 기후 변화 자체를 부정하거나 기후 위기에 대응할 필요성을 외면하는 사람으로 비춰지는 것을 경계한다. 기후 과학자인 저자는 기후 변화에 관한 학문적 연구를 해 오며 IPCC(기후 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의 2007년 노벨평화상 공동 수상에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하는 인증서를 받기도 했다. 그는 기후 변화는 실존하고 기후 변화로 생기는 위기가 심각하며 이런 위험을 줄이려는 노력과 적응 방안을 찾을 필요성에 충분히 동의한다. 그럼에도 자신의 주장을 둘러싸고 제기될 법한 의문들에 대한 반박을 이 책의 말미에 게시하면서, 기후 변화에 대한 과학 및 사회과학 연구의 올바른 방법과 기후 정치에 필요한 균형 있는 관점을 제안한다. 과학적 불확실성을 우선적으로 생각하고, 벼랑 끝에 몰려 있다는 시한부주의를 완화하고, 가치의 다원성을 인정하며, 다원적 목표를 추구할 것을 촉구한다. 설사 지구 온도 2도 상승을 막지 못한다하더라도 지구는 끝장나지 않기 때문이다. 지구 온도에 집착하는 종말론적 기후주의에 휘둘려 누군가의 희생으로 그 목표를 이루는 것보다, 지구 온도는 상승했으나 인류의 복지와 정치 안정, 생태적 온전성 측면에서 더 나은 미래 세계를 이루는 것이 옳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지구의 멸망을 막는 것이 아닌, 인류의 지속 가능한 발전 목표로 나아가는 데 있어 기후 변화는 유일한 요소도 아니고 가장 중요한 요소도 아니라는 점을 말하고자 한다. 기후 변화가 전부는 아니기 때문이다.
어머니와 딸, 애도의 글쓰기
피에르루이 포르 저 / 유치정 역 / 18,000원 / 문학과지성사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 은밀한 애도
시몬 드 보부아르, 회복의 애도
아니 에르노, 애도의 글로 부활하는 어머니 글 쓰는 딸들이 언어로 직조한 애도의 방 때로는 사랑했고 때로는 두려워했으며,
선하면서 악했던 어머니, 현존하는 혹은 부재하는 어머니. 이 특별한 타자를 장례 치르는 그들의 방식 문학적이면서 정신분석적인 접근 방식으로 전문가와 일반 독자 모두에게 다가갈 수 있는 연구를 이어온 프랑스 문학 연구자이자 세르지파리 대학교 교수인 피에르루이 포르의 『어머니와 딸, 애도의 글쓰기-유르스나르, 보부아르, 에르노』가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여자인 ‘나’는 어머니의 “분신이면서도 별개의 존재”이기에 어머니의 죽음은 나의 정체성을 뒤흔든다. 나의 일부이자 존재의 뿌리, 어머니가 없는 세상을 어머니가 있던 세상과 똑같이 살 수는 없다. 잘려 나간 그 존재의 무게만큼 내면의 무게도 달라지고 세상의 무게도 달라진다. 영혼이 흔들리는 ‘상실’ 앞에서, 남겨진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 ‘애도’를 거쳐야 한다. 애도는 단순히 슬픔을 마무리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어머니)”가 없는 세상에서 존재의 방식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글을 쓰는 딸들은 ‘글쓰기’를 통해서 상처의 근원으로 돌아가 살아갈 힘과 지혜를 구한다. 애도는 자기 구원의 문제이기도 하다. 세 작가는 각자의 방식으로 그 일을 해냈다. “누가 애도를 두려워하랴” 애도의 장소로서의 글쓰기 “소중한 누군가가 사라지게 되면, 우리는 살아남은 죄에 대해 고통스러운 회한을 무수히 느낀다.” _시몬 드 보부아르『아주 편안한 죽음』에서 슬픔의 유효기간은 얼마일까? 애도의 기간은 얼마가 적당할까? 왜, 어떻게 애도를 해야 하는가? 서양에서는 오랜 시간 죽음에 대한 논의가 금기시되어 왔다. 죽음을 회피하고, 은폐하고 소외시켰다. 오늘날은 짐짓 달라 보인다. “웰빙”을 넘어 “웰다잉”에 관심을 갖는 시대이지만, 그것은 “죽음”의 주체에 대한 것이며, 남는 자들에 대한 고찰도, 이해도 여전히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는다. 애도의 과정은, 상실한 대상에 대한 기억을 돌아보면서, 상실한 대상과 함께한 기억의 일부를 자아로 동화시키는 ‘내면화’의 과정을 거친다. 저자 피에르루이 포르는 어머니의 죽음을 마주하고 쓴 세 여성 작가들의 작품,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의 「죽은 여인을 위한 일곱 편의 시」(1930), 『경건한 추억들』(1974), 시몬 드 보부아르의 「아주 편안한 죽음」(1964), 아니 에르노의 『한 여자』(1987), 「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못했다」(1997)를 분석하며, 글쓰기 자체가 애도의 과정이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작품의 형성-글쓰기는 회복의 절차이고, 작품이라는 실체는 회복의 증거라고 설명한다. 이 텍스트들은 각 작가의 개성과 시대, 삶의 여정과 미학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에 대한 애도의 글이라는 점에서 일치한다. 이 작품들은 어머니라는 특별한 타자를 장례 치르는 방식이다. 버지니아 울프의 표현을 빌리면, 세 사람은 모두 일시적으로나마 “자기만의 방”을 “장례의 방”으로 만들었다. 저자는 이들의 글쓰기가 “분리에 이르기 위해 애착을 증가시키는 방법”이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가장 원초적인 관계, “어머니와 딸”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 시몬 드 보부아르, 아니 에르노 글 쓰는 딸들의 애도의 글쓰기 나에게 어머니는 언제나 존재해 계신 분이셨고, 어느 날인가, 곧, 어머니가 돌아가시게 될 거라는 생각을 진지하게 한 적은 결코 없었다. 어머니의 죽음은, 어머니의 태어남이 그런 것처럼, 신화의 시간 속에 위치해 있었다. _시몬 드 보부아르『아주 편안한 죽음』에서 저자의 ‘애도’에 대한 관심은 프로이트의 애도 이론에 대한 공감과 비판에서 출발한다. 프로이트는 애도를 연인이나 친구, 부모와 같은 개인적 애정의 대상이 사라져버린 후 남은 자의 내면에서 나타나는 심리적 과정으로 설명한다. 즉 “애도는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 또는 사랑하는 사람과 같은 위상에 둘 만한 추상적인 것, 조국, 자유, 이상과 같은 것의 상실에 대한 정상적인 반응”인 것이다. 프로이트의 애도 이론은 “상실로 인한 슬픔과 고통을 극복하고 일정 시간 이후 일상으로 적응해나가는 정상적인 상태” “대상에게 집중되어 있던 리비도를 철회함으로써 자신의 일상을 회복하는 과정과 결과”로 요약될 수 있다. 이 책의 저자는 프로이트에 공감하지만 프로이트가 무시한 듯이 보이는 여성 영역의 애도, ‘가장 원초적인 관계’인 어머니와 딸의 관계를 탐구한다.그러므로 작가인 딸들이 쓴 애도의 텍스트는 여성적 세계에 대한 탐구가 되기도 한다. 태어난 지 열흘 만에 어머니를 여읜 유르스나르는 어머니의 부재가 중요하지 않다고 끊임없이 말하면서도 그녀의 자서전 3부작 중 첫번째 『경건한 추억들』은 그녀의 어머니를 중심으로 구성되고, 상실과 후회의 감정을 지나서 평온함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주는 유르스나르의 소네트들은 ‘글’이라는 매개를 통해서 ‘삶의 길’을 여는 모습을 보여준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그토록 가까운 존재의 병든 육체, 그리고 죽음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초라한지를 생각한다. 당대에 금기였던 주제, ‘죽음’과 ‘노년’의 문제를 결부해 사유하면서 어머니의 고통에 공감하고 보살피는 마음을 배웠고, 육체적 무력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존엄하다는 사실을 배운다. 시몬 드 보부아르에게 ‘애도’는 ‘회복의 애도’이다. 아니 에르노는 텍스트 속에서 세상을 떠난 어머니와 함께 살아감으로써 어머니에게 새로운 생명을 부여하고 ‘삶과 죽음’ 사이라는 고통의 시공간을 빠져나온다. 또한 애도의 글쓰기는 어머니에 대한 진실 추구인 동시에 신앙심 깊었던 어머니에게 ‘영광의 육체’를 부여하는 일이다. 기독교적인 의미에서 영광의 육체가 최후의 심판일에 부활의 영광을 누리는, 영적인 의미의 몸이라면, 에르노가 어머니에게 부여한 영광의 육체는 언어적 차원에서 형성된다. 메멘토 모리 세 명의 뛰어난 작가는 글쓰기를 통해 어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애도의 작업을 완성한다. 이를 통해 상실의 고통을 완화하고, 다시 살아갈 힘을 구한다. 애도의 글쓰기는 사라진 존재들을 지우는 방식이 아니라 작품 안에 담아내는 방식, 죽음과 어머니의 무게를 작품에 ‘안고 가는 방식’을 통해서 평화에 이른다. 어머니를 잃은 딸은 자아, 자기 정체성, 어머니와 맺은 관계 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상실’은 애도의 글쓰기 속에서 변화한다. 작가인 딸들은 대담한 시도 속에서 어머니와 맺은 복합적인 관계를 드러내는데, 그들이 어머니를 작품에서 강렬하게 불러들인 것은, 그만큼 어머니를 잘 보내드리기 위해서다. 어머니를 보내드리기. 어머니를 잊자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가 다른 곳에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한 일이다. 순리대로 일어난 혈육의 죽음, 상실의 아픔이 이런데, 순리를 벗어난 자식의 죽음, 그 상실의 고통은 어떻게 견디고 위로할 수 있을까? 역자 후기를 쓰는 내내, 괴롭고 착잡했던 까닭이다. 따라서 어떤 애도는 공동체의 가능성, 사회적 정의에 관한 질문이 된다. 무고한 타인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자들이 상실의 슬픔을 짓밟는 모습을 지켜보는 고통과 수치는 사회 구성원의 몫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 이들 애도의 글쓰기를 번역하면서 인간의 ‘존엄’은 어머니와 딸, 원초적인 인간관계를 통해 배우게 되는 경험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존엄의 자각은, 혼자서는 다 알 수 없는, 공동체적 경험이다. 메멘토 모리. _「옮긴이의 해설」에서 ■ 언론의 찬사 피에르루이 포르의 책에서 우리는 뛰어난 작가들의 지성, 그리고 언제나 보편성을 지향하는 작가들의 글쓰기가 지닌 극도의 개성을 발견한다. 『리르Lire』 풍부한 인용과 진지한 자료 탐색 등, 작가에 대한 심오하고 예리한 탐구를 보여준다. 『엑스프레스L’Express』 문학작품을 다양한 관점으로 조명하면서 전문가들과 일반 독자 모두에게 다가설 수 있는 연구를 한다. 『프랑스 앵포France Info』 상속세를 폐하라
서채종 저 / 16,800원 / 글통 살 것만 같던 마음 이영광 저 / 10,000원 / 창비 반짝이며 반짝이며 헤엄쳐 오던,
살 것만 같던 마음
이름을 잃어버린 존재들을 위한 빛나는 구원 무너진 삶을 있는 힘껏 끌어안는 화해의 손길 선명하고 아름다운 언어로 존재의 고통과 현실의 아픔을 노래해온 이영광 시인의 여덟번째 시집 『살 것만 같던 마음』이 창비시선 502번으로 출간되었다. 4년 만에 선보이는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일상의 복잡미묘한 감정과 들끓는 마음들을 살피며 삶과 죽음의 관계, 존재의 본질과 의미에 대한 진지하고도 심오한 사유의 세계를 펼쳐 보인다. 불합리한 세상의 이면을 깊이 들여다보고 타인의 고통을 체험하며 삶의 진실에 가닿으려는 고뇌가 담긴 진솔한 시편들은 서늘하고도 묵직한 공감을 자아낸다. 한층 더 깊고 섬세해진 시세계는 침잠의 시간 속에서 차분히 현실을 살필 수 있는 시간을 선물한다.
외롭고 우직한 발걸음사랑의 완성을 향해 달려가는 총 51편의 시를 부 가름 없이 한데 엮어낸 이번 시집에서는 먼저 짧은 시행만으로 구성한 시편들(「별 세개」 「허송 구름」)과 “무언가를 따지고/누군가를 미워했다/(…)/누군가를 따지고/무언가를 미워했다”(「강가에서」), “사람을 얻고 잃으며 바쁘게 살았어요/마음을 울고 웃으며 곤하게 걸었어요”(「희망 없이」)와 같이 유사한 어구를 반복하고 변주함으로써 유려한 리듬감을 형성하는 시편들의 형식이 눈에 띈다. 특히 “살지 않기 위해 살아갈 것/죽지 않기 위해 죽을 것”(「평화식당」), “죽은 봄은 살아간다/(…)/어둡기만 한 빛 속으로/가도 가도 환하기만 한/어둠 속으로”(「봄은」) 등 역설과 반어의 문장들은 시대의 모순에 대한 시인의 비판적 사유와 현실 인식을 더욱 돋보이게 해준다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희망 없이 사는 일의 두근거림”(「희망 없이」)이 쓸쓸하게 일렁이는 이영광의 풍경 속에는 병든 세상을 살아가는 존재들이 등장한다. “이름 없는 모든 것”과 “이름 아닌 모든 것”(「검은 봄」)인 그들은 이미 “기진맥진인데 하루도/빠짐없이 삶이 찾아”(「제자리」)오는 탓에 절망 속에서도 “자꾸 다시 살아나야”(「어느 양육」)만 한다. 시인은 그 ‘슬픔과 허무와 죽음과 불안과 절망의 포로’(「평화의 바람」)로서 우울의 시대를 살아가는 무명의 존재들을 발견하고 그들에게 다가간다. 그들을 연민의 시선으로 호명하고, 그들의 침묵의 언어에 귀를 기울이며 비참한 고통의 현장을 함께하고자 한다. 그렇게 시인은 “계산할 수도 없고, 차마 꺼낼 수도 없는, 이상하고도 힘든 마음”을 품은 채 “무명의 사랑”(해설, 장은석)을 계속해나간다. 나아가 존재의 슬픔을 온몸으로 통과하며 상처가 지나간 곳에서 마주하게 될 희망의 자리를 마련해놓는다. 고통과 희망 사이를 넘나들며 끝내 인간에 대한 애틋함에 가닿는 시편들은 생의 면면이 선사하는 감동으로 우리를 이끈다. 어두운 세상을 건너는 모든 이에게 시인은 ‘시인의 말’을 통해 “시 쓰는 시늉을 해온 것 같다”고 말했지만, 세상의 어두운 면면에 기꺼이 다가가 온몸으로 시를 써온 삶은 결코 시늉이 아닐 것이다. 시력 26년을 지나며 “거창하지 않은 오해로부터 마음을 가늠할 수 있는 고개를 넘고 또 넘는”(추천사, 홍지호) 와중에도 불현듯 여전히 “인간이라는 것”이 되고자 “열심열심/애쓰는 중”(「중」)이라고, “시는 크고 나는 작다”(시인의 말)고 말하는 그의 숭고한 진심은 시인의 시가 무모해 보이는 사랑을 멈추지 않는 이유를 보여준다. 그렇게 시인은 비극적인 세상의 아픔을 끌어안고 무너진 삶의 자리를 향해 계속해서 손을 내민다. 함께하지 못하게 하는 모든 분열과 맞서 싸우는 이 올곧은 마음은 이름이 지워진 존재들이 연대할 수 있는 세상으로 향하는 길을 만들고, 바로 그곳에서 상처투성이 존재들의 영혼을 품어 안는 희망의 시는 시작된다. 지금 여기, “생각하며 피 흘리는/인간”(「로보캅」)이 어두운 시절을 건너는 이들을 위로하는 자리에서 “사라져서 더는 나타나지 않던 얼굴들”(「어느 양육」)이 다시 피어나기 시작한다.
갈라지는 욕망들
한영인 저 / 24,000원 / 창비 문학의 유용함을 증명하는 비평가의 힘
독창적 시각, 도발적 질문, 힘있는 문장 누가 읽어도 흥미로운 평론집의 등장 계간 『창작과비평』 편집위원으로서 독창적인 시각과 도발적인 질문을 바탕으로 힘있는 비평을 써내며 독자들의 주목과 문단의 인정을 두루 받아온 문학평론가 한영인의 첫번째 평론집 『갈라지는 욕망들』이 출간되었다. ‘한류’ ‘캔슬컬처’ 같은 톡톡 튀는 주제를 섬세한 독해와 결부해가며 흡인력 있는 글을 완성하는 발군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데 더해 기존 문학평론집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유머와 위트까지 곳곳에 담아냈다. 문학이라는 틀로 작금의 사회적 현상과 징후를 명민하게 포착해내는 감각이 돋보이는데, ‘갈라지는 욕망들’이라는 제목에는 저자의 이러한 지향이 오롯이 담겨 있다. “오늘날 한국 소설의 주체들은 과거 산업사회가 약속한 번영의 미몽에 여전히 붙들려 있으면서도 동시에 파멸이 예정된 작금의 경로에서 이탈해 더 나은 세계와 접속하고 싶다는 모순된 욕망을 체현하고 있다”(「책머리에」, 5~6면)라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한영인은 이러한 모순을 이해하기 위해 ‘욕망의 갈라짐’이라는 개념을 고안해낸 후 경기침체, 기후위기 등 거대한 위기 앞에 놓인 여러 주체를 통해 여태껏 세속적 욕망만을 좇아온 한국사회에 균열이 발생했음을 포착한다. 기존 사회를 지탱하던 성장 일변도의 논리가 갈 길을 점차 잃어가는 상황에서 우리는 과거와는 다른 어떤 욕망을 추구할 수 있을지를 한국 소설을 통해 짚어낸다. 광활한 관심사와 다양한 문화적 맥락을 종횡무진 엮어내는 필력은 저자의 주장에 한층 힘을 실어준다. 사회적 위기 상황 앞에 ‘문학이 무용(無用)하다’는 인식이 팽배해져가는 지금, 문학이 여전히 강력한 도구이며 또한 재미있는 오락거리임을 증명하는 한권의 평론집이 세상에 등장했다.
사회와 문화를 연결하는 문학의 힘폭넓은 스펙트럼, 균형 잡힌 시선 총 4부로 구성된 이번 평론집의 제1부 제목은 ‘전환 시대의 비평 논리’로, 고(故) 리영희 선생의 명저 『전환시대의 논리』(창작과비평사 1974)를 오마주한 것이다. 이 장에는 「‘뉴노멀’ 시대의 소설」 「우리 시대의 노동 이야기」 「‘한류’와 협동적 창조의 가능성」 등이 실려 있는데, 전환기에 소설적 주체가 어떻게 대응하는지를 살펴볼 수 있어 특히 흥미롭다. 저자는 한국 소설의 주체들이 내보이는 모순적 욕망, 즉 과거 산업사회에서 추구하던 성장의 욕망을 간직한 동시에 여기에서 탈피해 새로운 세계를 상상해보려는 욕망을 섬세하게 기록한다. 그러나 이를 성급하게 재단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역사화해낸 것이 큰 미덕이다. 독자들은 한국사회의 면면을 소설의 문장을 통해 발견할 수 있으며, 또한 최근 한국 소설의 뚜렷한 경향을 파악하는 것이 가능하다. 제2부는 ‘‘문학의 윤리’가 말한 것과 말하지 않은 것’이다. ‘윤리’의 문제는 최근 사회·문화계 전반에서 첨예한 이슈인바, 읽는 이에게 넓고도 많은 시사점을 제공한다. 여기에는 ‘문단 내 성폭력’ ‘캔슬컬처’ ‘정치적 올바름’ 등의 주제가 포함되어 있어서 평소 문학평론을 자주 접하지 않은 독자도 관심을 가질 만한 내용이 포진되어 있다. 저자는 “문학이 감당해야 하는 새로운 윤리적 지침을 내세우기보다 그 지침의 완성을 위해서라도 마주하지 않을 수 없는 물음의 목록을 제출”(7면)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 덕분에 윤리의 문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일방에 치우치지 않고 여러 사안을 균형잡힌 시선으로 파악했다. 제3부 ‘비평의 안과 밖’은 비평가로서의 고민이 응축된 장이다. 최근의 에세이 열풍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를 써내려간 「자아 생산 장치로서의 에세이」, 그리고 ‘문학성’이란 무엇인지 고찰해보는 「문학성(文學性)에서 문학성(文學+城)으로, 그리고 그 밖으로」 등이 담겼다. 개인적인 소회와 내밀한 고민이 도드라지는 장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그런 만큼 읽어나가는 동안 저자와 대화하는 기분이 되어 속도감 있는 독서가 가능하다. 제4부 ‘문학은 어디에서나 온다’는 작품론 모음으로 이 책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여타 평론집의 작품론 모음과 그 구성 면에서 차이를 보이는데, 우선 작품 간의 진폭이 무척 크다는 것을 알게 된다. 뚜렷한 관점과 확고한 주장이 있음에도 한영인은 자기 입맛에 맞는 작품 경향을 좇기보다는 과감하게 다양한 작품을 선정한다. 그 결과 이 책에는 고인이 된 김소진의 소설부터 신예 성혜령의 소설까지, 조선족 작가인 금희의 소설부터 노벨상 수상 작가인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까지 세대와 국경을 넘나드는 다양한 작품이 담겼다. 한권의 평론집에서 읽을 수 있는 스펙트럼의 최대치라 할 만하다. 판이해 보이는 작품을 한 궤로 꿰뚫는 저자의 분석이 감탄스러운 한편으로, 독자들은 다양한 종류의 간접 독서가 가능하다. “한영인의 글은 문학비평의 근본적인 자리와 이것이 도달할 수 있는 저 먼 지점까지를 상상해보게 한다. 특히 한국어 단어가 유통되는 사회적인 맥락을 섬세하게 감식하고 감안하는 그의 비평을 통해서 문학은 전후좌우 상하로 열린, 매순간 사방팔방으로 한 사회와 문화의 요소가 형성하는 기류가 나고 드는 자리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추천사, 김나영 평론가) 그렇기에 한영인의 문학평론은 그저 비평에서 그치지 않고 새로운 질문과 토론의 연쇄로 이어진다. 문학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갈라지는 욕망들』이 한권의 비평집 이상의 의미가 되리라 기대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독자들은 이 책을 읽는 것만으로 생각을 나누며 토론의 장에 참여하는 경험을 얻게 될 것이며, 이는 또다른 질문과 주장이 되어 한국문학을 풍성하게 할 것이다.
문학과사회 146호 (2024년 여름) 문학과사회 편집동인 저 / 15,000원 / 문학과지성사 장르의 안팎에서 타인이 뜻밖에 그리고 역설적으로― 유의 논리la logique du genre에 대항해― 더할 나위 없이 나와 상관있는 사람으로― 발견되는 것처럼. ― 에마뉘엘 레비나스 에마뉘엘 레비나스 지금 우리는 ‘장르’라는 말을 어떻게 생각하고 사용하고 있을까? 최근 ‘○○○은 하나의 장르’와 같은 식의 말을 종종 듣게 된다. 어떤 창작자나 집단의 ‘오리지널리티’를 강조하는 표현인데, 그러기 위해 장르라는 말이 쓰이는 것이 흥미롭다. 또 요즘엔 ‘나와는 코드가안 맞아’ 같은 식의 말도 흔하게 들을 수 있다. 어떤 사람이나 집단, 콘텐츠에 감응할 수 없고 오히려 어긋나거나 부딪힌다고 느낄 때 쓰는 말이다. 그 말에서 ‘코드’는 대상의 어떤 내적 특징보다는 대상과 자신의 ‘관계성’에 대한 것이다. 즉 코드가 맞으면 접속할 수 있고, 코드가 맞지 않으면 접속할 수 없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그리고 두 가지 말 모두, 많은 사람이 어떤 개성이나 감성, 관점이나 세계관 등을 자연스럽게 장르나 코드로 느끼거나 파악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듯하다. 물론 이러한 용법은 단어의 사전적·역사적·학술적인 용례와는 퍽 다르다. 흔히 장르는 각각의 문화·예술 영역 분과를 지칭하기 위해 사용되어왔고, ‘순수예술’ ‘순수문학’ ‘고급문화’와 대비되는 ‘하위문화’의 영역들을 (막연하게) 지칭하기 위해 사용되기도 했다. 문학사에서 본격소설이나 순수소설은 경향소설, 세태소설, 감상소설, 장르소설 등과의 부정적 대비 속에서 규정되어왔다. 때로는 비판적인 어조로, 때로는 자조적인 어조로 ‘문단 문학 역시 하나의 장르일 뿐’이라는 이야기도 되풀이되어왔다. 이런 인식은 보편적인 것으로 여겨져온 이른바 순수문학을 상대화하여, 순수문학이 어떤 (역사적·제도적·비평적으로 구성된) 장르인지 검토할 수 있게 했다. 그런데 장르들을 위계적으로, 영토적으로 구분하고 규정하는─그 위계를 보전하기 위해서건 전복하기 위해서건─사고방식은 동시대의 감상 경험과 얼마간 동떨어진 것처럼 보인다. 점점 더 많은 사람이 다양한 매체와 장르 들을 일상적으로 넘나들면서 다양한 콘텐츠를 향유하고 지속적으로 영향을 받으며, 또 장르의 구성에 영향을 끼친다. 가령 한 감상자는 어떤 영 화·소 설·웹 툰·시리즈 물 을 비슷한 시기에 여러 매체와 장치를 통해 즐기는 동시에, 어떤 전시·공연·영화·소설·웹툰 등(혹은 그 감상자·소비자가 공유하는 문화와 언어)에 대해서는 전혀 접속할 수 없다고 느낄 수 있다. 이때 장벽은 고전적 장르나 매체의 경계보다는 더 유동적이고 수행적인 코드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장르를 (소설·조각·연극·영화 같은) 예술 영역이나 (판타지·로맨스·SF 같은) 역사적으로 형성된 허구의 경향뿐 아니라 담론적/비담론적 요소들을 특정 방식으로 엮는 잠정적 규약·관습·제도를 지칭하는 말로 이해해볼 수 있을까? 이렇게 생각해보면 하나의 장르로 보이는 것은 하나의 장르가 아니고, 또 분리된 여러 장르로 보이는 것이 하나의 코드를 공유하기도 한다. 오늘날의 감상자는 다양한 플랫폼과 미디어, 영역 들을 넘나들면서 전통적인 문화·예술 영역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취향을 형성한다. 반대로 취향들, 영역들이 세분되고 진화해나가면서 ‘외부자’들은 이해하기 힘든 코드나 문법이 고도화되기도 한다. 취향이나 장르적 문법의 차이는 (계층이나 지역, 학력 같은) 사회적 차이나 (‘남성향’ ‘여성향’ 같은 말처럼) 성별화된 욕망과도 연동되어 있을 것이다. 또 사회적 차이들이 특수한 장르를 낳기도 하지만, 반대로 장르가 사회적 경계를 강화하기도 할 것이다. 장르 간의 장벽은 한편으로 잘 모르는 장르에 대한 오해와 단순화를 낳기도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장르의 문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 장르를 이해하거나 즐길 수 없다는 식으로) 배타적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소수자가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내거나 기성의 장르적 문법을 전유하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에 ‘장르적 코드화’는 전략적 효용을 갖는 동시에 어떤 존재를 특정한 방식으로 재현·호명하는 문법이 될 수 있다. 이런 생각들과 함께 이번 『문학과사회 하이픈』 여름호에서는 일반적인 용례보다 넓은 의미에서 장르를 다시 생각해보고자 했다. 이러한 요청에 여섯 필자가 귀한 글로 응답해주었다. 먼저 나원영의 「우리가 포스트-록을이해하기를 멈출 때」는 ‘포스트-록’이라는 모호하고 분열적인 장르에 대한 고찰이다. 나원영은 대중음악 평론가로서 과거 자신이 한국의 포스트-록에 관해 썼던 글의 미흡함이나 착오를 짚어보면서, “지난 수년간 죽도록 괴로워한 장르의 문제”를 이야기한다. 다른 대중음악 장르도 마찬가지이지만, 포스트- 록은 어떤 명확한 실체나 성격으로 규정하기 어렵다. 그런데도 그것을 어떤 내적 요소로 규정하려 한다면, “실은 특정시공의 우연한 조건에서만 가능했던 사운드”를 장르의 보편적 특징인 것처럼 착각하게 될 수 있다. 따라서 나원영은 음악의 장르를 내적인 본질이나 음향적 속성이 아니라 특정한 “청취·창작 양태”를 통해 사고하고자 한다. 이 양태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기술적·사회적·담론적 정황에 따라 다르게 형성된다. 따라서 영국이나 미국의 포스트- 록과 한국에서의 포스트- 록은 다를 수밖에 없다. 이 차이는 한국에서 형성되는 장르의 상대적 고유성을 주장할 수 있게 하는 동시에, 여전히 ‘원본성’을 의식하는 “문화적 주변부”라는 분열적 정체성 또한 돌아보게 한다. 이처럼 이 글은 특수한 장르에 대한 고찰이지만 2000년대 이후 한국이라는 시대적·지리적·문화적 조건에 대한 고찰로 확장된다. 나원영의 독특한 아카이브적 글쓰기는 자신의 글을“장르를 즐거이 거닐 만한 통로로 넓히고 싶”다는 마음에서 나온 것일 테다. 안희제의 「사랑은 망한다─ 장르의 잔여, 붙잡을 수 없는 욕망」은 케이팝 팬덤 문화에서 자주불거지는 ‘논란’이 그 문화를 하나의 장르로 구성하는 동인이라는 흥미로운 주장을 제시한다. ‘소비’로 해소될 수 없는 팬들의 정념은 논란이라는 장치를 거쳐 소비의 동력으로 회수된다. 그 과정에서 연예인과 팬은 상처받고 다칠 수 있지만, 케이팝이라는 산업 혹은 문화적 장르 자체는 계속해서 보전되고 융성할 수 있다. 논란도 추리소설이나 음모론 같은 ‘서사적 틀’을 갖추고 있으니 그 자체로 하나의 장르(케이팝 장르의 ‘ 2 차 창작’ 장르)이자 케이팝을 장르화하는 결정적 동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역으로 생각해보면 ‘사랑’은 그러한 장르적 소비 양태속에서 충분히 수용되거나 재현될 수 없는 ‘잔여’가 된다. 그 사랑은 케이팝 장르를 가능하게 하지만, 동시에 장르의 외부로 계속해서 격리된다. 따라서 ‘매혹’은 필연적으로 ‘좌절’을 겪게 되고, 이 사랑이 사랑이 맞기는 하냐는 의심도 계속해서 불거진다. 안희제는 그러한 잔여가 “비평과 토론이 창발”하는“생성의 장소”가 될 수 있다고 말하며 “뚜렷이 언어화할 수 없는 모순들”을 들여다보자고 제안한다. 이은지의 「장르적인 것으로부터 사회적인 것을 구해내기─ 장르물의 체제 종속성과 자율성에 대하여」는 여러 층위의 장르물이 구성되는 경제적·역사적 조건을 비판적으로 짚으면서도, 그러한 조건 속에서 얼마간 ‘자율적인 미적 체험’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독자와의 상호작용이 일찍이 강조됐던 추리소설에서는 소위 ‘본격소설’에서보다 ‘상호 주체성’이 먼저 실험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작품이 구성되는 과정에 개입하는 그 적극성은 오늘날 웹소설 독자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는 면모다. 그렇게 다수의 독자가 웹소설에 “대중적이고 친숙한 코드를 최대한 활용”하도록 촉구한다면, 웹소설은 “욕망의 ‘사회적’ 성격”을 구현하는 창작물로서 탁월하게 이중적인 측면을 지닐 수 있다. 즉 웹소설은 대중 독자와의 더 즉각적이고 광범위하며 불가피한 상호작용을 통해 이 사회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전면적으로 보여줄 뿐 아니라, 그 내부에서 거기에 “대항하는 힘이 될 수도 있는 미적 체험”까지 제공할 수 있다. 이은지가 제안하는 바는 말하자면 웹소설에 대한 ‘변증법적’ 독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융희의 「‘장르문학’이라는 독법」 역시, “텍스트에서 수용자로” 방점이 이동한 현대에 창작물의 장르를 규정하는 것은 창작물의 내적 요소(텍스트 속의 코드나 장르적 화소)가 아니라 수용자 혹은 소비자의 소비 방식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이융희는 “특정한 텍스트의 양식”보다는 “‘장르문학’이라는 소비자”의 탄생에 초점을 맞춘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한국에서 그 소비자의 탄생이 일본 문화의 (밀)수입 그리고 ‘반일 정책’과 관련 있다는 주장이다. 1980년대에 막 형성되기 시작한 그 소비자 집단의 형상은 “부르주아 계층의 엘리트 얼리어답터 기득권들”이었다. 그들이 부모 세대의 문화와 제도에 반발하면서, 한편으로는 민족주의적인 정책이나 지적 경향에 비추어 비난받으면서도 일본에서 여러 문화를 발 빠르게 ‘수입’해 자신들의 문화를 만들어갔는데, 그것이 한국의 장르문학 소비자의 시초라는 것이다. 그들의 위치와 동기를 고려했을 때 그들의 소비가 “‘환상’으로 귀결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라고 말하면서도 그 ‘환상’의 기능과 동력을 자세히 짚어본다. 이융희는 결론적으로 장르가 텍스트의 문법이나 내적 요소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수용과 소비의 양태에 따라 형성되는 것이기에 고정적으로 정의될 수 없다고 강조한다. 그 변화와 순환, 해체의 과정을 “계보적”으로 짚을 수 있을 뿐이다. 소유정의 「마주침의 장소에 대한 회고─필굿 소설이 그리는 안전한 세계의 위험성」은 ‘필굿 소설(feel-good novel)’이라 불리는 어떤 장르 혹은경향에 대한 성찰에서 출발한다. 자의에서든 타의에서든 최근 그런 이름으로 묶이는 소설들이 “이례적인 판매량을 기록”하고 있지만, 어쩌면 “모든 골치 아픈 요소를 배제한 나머지 판타지에 가까워”진 듯 보이기도 한다. 그러한 경향이 나타나는 사회적·시대적 이유를 헤아리면서도, 일련의 소설들이 손쉬운 위로를 통해 엄연히 존재하는 갈등이나 문제를 표백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려하는 것이다. “너무나 안전한 결말”을 보여주는 소설은 독자가 해석하고 생각할 여지를 차단하는 것일 수 있다. 소유정은 이러한 우려로부터 문학의 기능과 의미에 대한 성찰로 나아가고, 설재인의 『월영시장』과 이서수의 『마은의 가게』에서 “개인적인 사안이기도 하나 사회적인 맥락을 결코 배제할 수 없는 문제들”을 읽는다. 이 글의 중요한 주장은 낙관이나 희망이 잘못되었다는 게 아니라 “갈등을 경험하지 않은 낙관은 거짓에 가깝다”는 데 있을 것이다. 전승민의 「가장음험한 가장─코드의 언어 경제로 보는 시와 소설 그리고 비평의 매트릭스」는 대항적·비판적으로 보이는 담론이나 경향 역시 자기중심적인 포섭 혹은 코드화일 수 있다는 문제의식 위에서 한국문학의 ‘퀴어’ 코드를 비판적으로 읽는다. 이 글에서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읽기의 수행’으로간주되는 비평 배후에 도사리는 “쓰기의 음침한 욕망”이다. 비평(가)은 스스로를 내세우기 위해 적당히(자신의 주체성에 위협이 되지 않는 범위에서) 발칙하거나 문제적인 작품들을 가져와 활용하는데, 넓은 의미의 ‘상품성’은 이 범위의 한계를 규정하는 물적 조건이다. 전승민은 “2010년대의 문단 내 미투운동” 이후, “문학 시장의 독자성이 여성으로 강하게 젠더화”되어 있고 “이 여성 젠더의 섹슈얼리티가 여전히 이성애 중심성을 채택하고 있음을 고려”했을 때 ‘게이’는 어쩌면 가장안전하고 ‘상품성’ 있는 코드였으리라는 과감한 가설을 제시한다. 또 퀴어 코드를 자기중심적으로 전유하는 ‘음침한 욕망’이 이미 2000년대의 시와 비평에서도 나타났음을 짚어낸다. 전승민은 그렇게 퀴어를 코드로 활용하는 경우 그 작업은 전혀 퀴어하지 않다고 말한다. 이 글의 중요한 주장은, 퀴어한 주체가 스스로를 코드화하더라도, 그것은 가시화를 위한 전략일 뿐 “하나의 규범화된 장소로 게토화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데 있을 것이다. 따라서 ‘퀴어함’은 (신자유주의적 소비의 코드든 비평적 담론의 코드든) 어떤 방식의 코드로 환원될 수 없고, 그러한 코드화를 초과하는 생성의 힘을 갖는다. 여섯 필자의 글은 ‘장르화’와 ‘코드화’라는 주제 자체를 다방면으로 확장하여 새로운 생각의 길을 여는 동시에 시의적인 안건을 예리하게 제시하고 있다. 이 글들을 통해 어떤 장르나 코드의 구성을 따져보면서 동시에 우리가 장르라고 여기는 것의 ‘잔여’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된다. 모든 장르에는 규약과 형성의 역사가 있고 또한 그 잔여가 있을 것이다. 그러한 잔여를 통해서 우리가 이미 형성된 코드의 교환이 아닌 방식으로, 장르의 경계를 넘어서 대화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싶다. 함께해준 필자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문학은 참으로 모호하고 일관성 없는 장르이고 그것이 문학의 생명력인 듯하다. 우리가 문학에 대해 아주 부분적으로밖에 말하지 못하더라도, 그 모호한 이름으로 우리가 모일 수 있다면, 어떤 특징으로 묶일 수 없는 다채로움을 보여주는 작품들 덕분일 것이다. 이번 호에서는 마종기, 송재학, 신용목, 장승리, 황유원, 임지은, 강혜빈, 김연덕, 장미도, 이실비 시인의 시와 조해진, 함윤이, 정기현 작가의 소설을 만나볼 수 있다. 편혜영 작가의 장편 연재도 이어지고 있다. 또 김나영, 조대한, 최가은, 황사랑, 박민아, 백지은, 송현지, 정홍수 평론가가 지난 계절에 발간된 단행본에 대한 애정 어린 리뷰를 보내주었다.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이 24회를 맞았다. 그 속에 담긴 열정과 질곡을 감히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작품을 마주해 벅차고 떨렸다. 새삼 신인문학상 제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생각해보면 거기에는 형언하기 어려운 역설이 있는 것 같다. 그렇지만 여러 어려움과 제약 속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며 응답을 요구하는, 빛나는 작품들도 있다. 마치 ‘타인이 뜻밖에 그리고 역설적으로─장르의 논리에 대항해’ 내게 말을 거는 것처럼. 심사위원들은 오랜 토의를 거쳐 시 부문에 구윤재의 「모래밭의 나쁜 아이에게」외 4편을, 소설 부문에 윤단의 「작은 알」을 선정했다. 아쉽게도 평론 부문에서는 당선작을 내지 못했다. 새로운 놀라움과 기대를 품게 하는 두 작가에게 많은 응원과 관심을 부탁드린다. 당선작과 당선 소감, 심사 경위는 본권에서 확인할 수 있다. 편집동인 이희우 여름호를 펴내며
장르의 안팎에서 타인이 뜻밖에 그리고 역설적으로― 유의 논리la logique du genre에 대항해― 더할 나위 없이 나와 상관있는 사람으로― 발견되는 것처럼. ― 에마뉘엘 레비나스 에마뉘엘 레비나스 지금 우리는 ‘장르’라는 말을 어떻게 생각하고 사용하고 있을까? 최근 ‘○○○은 하나의 장르’와 같은 식의 말을 종종 듣게 된다. 어떤 창작자나 집단의 ‘오리지널리티’를 강조하는 표현인데, 그러기 위해 장르라는 말이 쓰이는 것이 흥미롭다. 또 요즘엔 ‘나와는 코드가안 맞아’ 같은 식의 말도 흔하게 들을 수 있다. 어떤 사람이나 집단, 콘텐츠에 감응할 수 없고 오히려 어긋나거나 부딪힌다고 느낄 때 쓰는 말이다. 그 말에서 ‘코드’는 대상의 어떤 내적 특징보다는 대상과 자신의 ‘관계성’에 대한 것이다. 즉 코드가 맞으면 접속할 수 있고, 코드가 맞지 않으면 접속할 수 없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그리고 두 가지 말 모두, 많은 사람이 어떤 개성이나 감성, 관점이나 세계관 등을 자연스럽게 장르나 코드로 느끼거나 파악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듯하다. 물론 이러한 용법은 단어의 사전적·역사적·학술적인 용례와는 퍽 다르다. 흔히 장르는 각각의 문화·예술 영역 분과를 지칭하기 위해 사용되어왔고, ‘순수예술’ ‘순수문학’ ‘고급문화’와 대비되는 ‘하위문화’의 영역들을 (막연하게) 지칭하기 위해 사용되기도 했다. 문학사에서 본격소설이나 순수소설은 경향소설, 세태소설, 감상소설, 장르소설 등과의 부정적 대비 속에서 규정되어왔다. 때로는 비판적인 어조로, 때로는 자조적인 어조로 ‘문단 문학 역시 하나의 장르일 뿐’이라는 이야기도 되풀이되어왔다. 이런 인식은 보편적인 것으로 여겨져온 이른바 순수문학을 상대화하여, 순수문학이 어떤 (역사적·제도적·비평적으로 구성된) 장르인지 검토할 수 있게 했다. 그런데 장르들을 위계적으로, 영토적으로 구분하고 규정하는─그 위계를 보전하기 위해서건 전복하기 위해서건─사고방식은 동시대의 감상 경험과 얼마간 동떨어진 것처럼 보인다. 점점 더 많은 사람이 다양한 매체와 장르 들을 일상적으로 넘나들면서 다양한 콘텐츠를 향유하고 지속적으로 영향을 받으며, 또 장르의 구성에 영향을 끼친다. 가령 한 감상자는 어떤 영 화·소 설·웹 툰·시리즈 물 을 비슷한 시기에 여러 매체와 장치를 통해 즐기는 동시에, 어떤 전시·공연·영화·소설·웹툰 등(혹은 그 감상자·소비자가 공유하는 문화와 언어)에 대해서는 전혀 접속할 수 없다고 느낄 수 있다. 이때 장벽은 고전적 장르나 매체의 경계보다는 더 유동적이고 수행적인 코드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장르를 (소설·조각·연극·영화 같은) 예술 영역이나 (판타지·로맨스·SF 같은) 역사적으로 형성된 허구의 경향뿐 아니라 담론적/비담론적 요소들을 특정 방식으로 엮는 잠정적 규약·관습·제도를 지칭하는 말로 이해해볼 수 있을까? 이렇게 생각해보면 하나의 장르로 보이는 것은 하나의 장르가 아니고, 또 분리된 여러 장르로 보이는 것이 하나의 코드를 공유하기도 한다. 오늘날의 감상자는 다양한 플랫폼과 미디어, 영역 들을 넘나들면서 전통적인 문화·예술 영역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취향을 형성한다. 반대로 취향들, 영역들이 세분되고 진화해나가면서 ‘외부자’들은 이해하기 힘든 코드나 문법이 고도화되기도 한다. 취향이나 장르적 문법의 차이는 (계층이나 지역, 학력 같은) 사회적 차이나 (‘남성향’ ‘여성향’ 같은 말처럼) 성별화된 욕망과도 연동되어 있을 것이다. 또 사회적 차이들이 특수한 장르를 낳기도 하지만, 반대로 장르가 사회적 경계를 강화하기도 할 것이다. 장르 간의 장벽은 한편으로 잘 모르는 장르에 대한 오해와 단순화를 낳기도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장르의 문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 장르를 이해하거나 즐길 수 없다는 식으로) 배타적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소수자가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내거나 기성의 장르적 문법을 전유하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에 ‘장르적 코드화’는 전략적 효용을 갖는 동시에 어떤 존재를 특정한 방식으로 재현·호명하는 문법이 될 수 있다. 이런 생각들과 함께 이번 『문학과사회 하이픈』 여름호에서는 일반적인 용례보다 넓은 의미에서 장르를 다시 생각해보고자 했다. 이러한 요청에 여섯 필자가 귀한 글로 응답해주었다. 먼저 나원영의 「우리가 포스트-록을이해하기를 멈출 때」는 ‘포스트-록’이라는 모호하고 분열적인 장르에 대한 고찰이다. 나원영은 대중음악 평론가로서 과거 자신이 한국의 포스트-록에 관해 썼던 글의 미흡함이나 착오를 짚어보면서, “지난 수년간 죽도록 괴로워한 장르의 문제”를 이야기한다. 다른 대중음악 장르도 마찬가지이지만, 포스트- 록은 어떤 명확한 실체나 성격으로 규정하기 어렵다. 그런데도 그것을 어떤 내적 요소로 규정하려 한다면, “실은 특정시공의 우연한 조건에서만 가능했던 사운드”를 장르의 보편적 특징인 것처럼 착각하게 될 수 있다. 따라서 나원영은 음악의 장르를 내적인 본질이나 음향적 속성이 아니라 특정한 “청취·창작 양태”를 통해 사고하고자 한다. 이 양태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기술적·사회적·담론적 정황에 따라 다르게 형성된다. 따라서 영국이나 미국의 포스트- 록과 한국에서의 포스트- 록은 다를 수밖에 없다. 이 차이는 한국에서 형성되는 장르의 상대적 고유성을 주장할 수 있게 하는 동시에, 여전히 ‘원본성’을 의식하는 “문화적 주변부”라는 분열적 정체성 또한 돌아보게 한다. 이처럼 이 글은 특수한 장르에 대한 고찰이지만 2000년대 이후 한국이라는 시대적·지리적·문화적 조건에 대한 고찰로 확장된다. 나원영의 독특한 아카이브적 글쓰기는 자신의 글을“장르를 즐거이 거닐 만한 통로로 넓히고 싶”다는 마음에서 나온 것일 테다. 안희제의 「사랑은 망한다─ 장르의 잔여, 붙잡을 수 없는 욕망」은 케이팝 팬덤 문화에서 자주불거지는 ‘논란’이 그 문화를 하나의 장르로 구성하는 동인이라는 흥미로운 주장을 제시한다. ‘소비’로 해소될 수 없는 팬들의 정념은 논란이라는 장치를 거쳐 소비의 동력으로 회수된다. 그 과정에서 연예인과 팬은 상처받고 다칠 수 있지만, 케이팝이라는 산업 혹은 문화적 장르 자체는 계속해서 보전되고 융성할 수 있다. 논란도 추리소설이나 음모론 같은 ‘서사적 틀’을 갖추고 있으니 그 자체로 하나의 장르(케이팝 장르의 ‘ 2 차 창작’ 장르)이자 케이팝을 장르화하는 결정적 동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역으로 생각해보면 ‘사랑’은 그러한 장르적 소비 양태속에서 충분히 수용되거나 재현될 수 없는 ‘잔여’가 된다. 그 사랑은 케이팝 장르를 가능하게 하지만, 동시에 장르의 외부로 계속해서 격리된다. 따라서 ‘매혹’은 필연적으로 ‘좌절’을 겪게 되고, 이 사랑이 사랑이 맞기는 하냐는 의심도 계속해서 불거진다. 안희제는 그러한 잔여가 “비평과 토론이 창발”하는“생성의 장소”가 될 수 있다고 말하며 “뚜렷이 언어화할 수 없는 모순들”을 들여다보자고 제안한다. 이은지의 「장르적인 것으로부터 사회적인 것을 구해내기─ 장르물의 체제 종속성과 자율성에 대하여」는 여러 층위의 장르물이 구성되는 경제적·역사적 조건을 비판적으로 짚으면서도, 그러한 조건 속에서 얼마간 ‘자율적인 미적 체험’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독자와의 상호작용이 일찍이 강조됐던 추리소설에서는 소위 ‘본격소설’에서보다 ‘상호 주체성’이 먼저 실험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작품이 구성되는 과정에 개입하는 그 적극성은 오늘날 웹소설 독자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는 면모다. 그렇게 다수의 독자가 웹소설에 “대중적이고 친숙한 코드를 최대한 활용”하도록 촉구한다면, 웹소설은 “욕망의 ‘사회적’ 성격”을 구현하는 창작물로서 탁월하게 이중적인 측면을 지닐 수 있다. 즉 웹소설은 대중 독자와의 더 즉각적이고 광범위하며 불가피한 상호작용을 통해 이 사회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전면적으로 보여줄 뿐 아니라, 그 내부에서 거기에 “대항하는 힘이 될 수도 있는 미적 체험”까지 제공할 수 있다. 이은지가 제안하는 바는 말하자면 웹소설에 대한 ‘변증법적’ 독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융희의 「‘장르문학’이라는 독법」 역시, “텍스트에서 수용자로” 방점이 이동한 현대에 창작물의 장르를 규정하는 것은 창작물의 내적 요소(텍스트 속의 코드나 장르적 화소)가 아니라 수용자 혹은 소비자의 소비 방식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이융희는 “특정한 텍스트의 양식”보다는 “‘장르문학’이라는 소비자”의 탄생에 초점을 맞춘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한국에서 그 소비자의 탄생이 일본 문화의 (밀)수입 그리고 ‘반일 정책’과 관련 있다는 주장이다. 1980년대에 막 형성되기 시작한 그 소비자 집단의 형상은 “부르주아 계층의 엘리트 얼리어답터 기득권들”이었다. 그들이 부모 세대의 문화와 제도에 반발하면서, 한편으로는 민족주의적인 정책이나 지적 경향에 비추어 비난받으면서도 일본에서 여러 문화를 발 빠르게 ‘수입’해 자신들의 문화를 만들어갔는데, 그것이 한국의 장르문학 소비자의 시초라는 것이다. 그들의 위치와 동기를 고려했을 때 그들의 소비가 “‘환상’으로 귀결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라고 말하면서도 그 ‘환상’의 기능과 동력을 자세히 짚어본다. 이융희는 결론적으로 장르가 텍스트의 문법이나 내적 요소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수용과 소비의 양태에 따라 형성되는 것이기에 고정적으로 정의될 수 없다고 강조한다. 그 변화와 순환, 해체의 과정을 “계보적”으로 짚을 수 있을 뿐이다. 소유정의 「마주침의 장소에 대한 회고─필굿 소설이 그리는 안전한 세계의 위험성」은 ‘필굿 소설(feel-good novel)’이라 불리는 어떤 장르 혹은경향에 대한 성찰에서 출발한다. 자의에서든 타의에서든 최근 그런 이름으로 묶이는 소설들이 “이례적인 판매량을 기록”하고 있지만, 어쩌면 “모든 골치 아픈 요소를 배제한 나머지 판타지에 가까워”진 듯 보이기도 한다. 그러한 경향이 나타나는 사회적·시대적 이유를 헤아리면서도, 일련의 소설들이 손쉬운 위로를 통해 엄연히 존재하는 갈등이나 문제를 표백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려하는 것이다. “너무나 안전한 결말”을 보여주는 소설은 독자가 해석하고 생각할 여지를 차단하는 것일 수 있다. 소유정은 이러한 우려로부터 문학의 기능과 의미에 대한 성찰로 나아가고, 설재인의 『월영시장』과 이서수의 『마은의 가게』에서 “개인적인 사안이기도 하나 사회적인 맥락을 결코 배제할 수 없는 문제들”을 읽는다. 이 글의 중요한 주장은 낙관이나 희망이 잘못되었다는 게 아니라 “갈등을 경험하지 않은 낙관은 거짓에 가깝다”는 데 있을 것이다. 전승민의 「가장음험한 가장─코드의 언어 경제로 보는 시와 소설 그리고 비평의 매트릭스」는 대항적·비판적으로 보이는 담론이나 경향 역시 자기중심적인 포섭 혹은 코드화일 수 있다는 문제의식 위에서 한국문학의 ‘퀴어’ 코드를 비판적으로 읽는다. 이 글에서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읽기의 수행’으로간주되는 비평 배후에 도사리는 “쓰기의 음침한 욕망”이다. 비평(가)은 스스로를 내세우기 위해 적당히(자신의 주체성에 위협이 되지 않는 범위에서) 발칙하거나 문제적인 작품들을 가져와 활용하는데, 넓은 의미의 ‘상품성’은 이 범위의 한계를 규정하는 물적 조건이다. 전승민은 “2010년대의 문단 내 미투운동” 이후, “문학 시장의 독자성이 여성으로 강하게 젠더화”되어 있고 “이 여성 젠더의 섹슈얼리티가 여전히 이성애 중심성을 채택하고 있음을 고려”했을 때 ‘게이’는 어쩌면 가장안전하고 ‘상품성’ 있는 코드였으리라는 과감한 가설을 제시한다. 또 퀴어 코드를 자기중심적으로 전유하는 ‘음침한 욕망’이 이미 2000년대의 시와 비평에서도 나타났음을 짚어낸다. 전승민은 그렇게 퀴어를 코드로 활용하는 경우 그 작업은 전혀 퀴어하지 않다고 말한다. 이 글의 중요한 주장은, 퀴어한 주체가 스스로를 코드화하더라도, 그것은 가시화를 위한 전략일 뿐 “하나의 규범화된 장소로 게토화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데 있을 것이다. 따라서 ‘퀴어함’은 (신자유주의적 소비의 코드든 비평적 담론의 코드든) 어떤 방식의 코드로 환원될 수 없고, 그러한 코드화를 초과하는 생성의 힘을 갖는다. 여섯 필자의 글은 ‘장르화’와 ‘코드화’라는 주제 자체를 다방면으로 확장하여 새로운 생각의 길을 여는 동시에 시의적인 안건을 예리하게 제시하고 있다. 이 글들을 통해 어떤 장르나 코드의 구성을 따져보면서 동시에 우리가 장르라고 여기는 것의 ‘잔여’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된다. 모든 장르에는 규약과 형성의 역사가 있고 또한 그 잔여가 있을 것이다. 그러한 잔여를 통해서 우리가 이미 형성된 코드의 교환이 아닌 방식으로, 장르의 경계를 넘어서 대화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싶다. 함께해준 필자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문학은 참으로 모호하고 일관성 없는 장르이고 그것이 문학의 생명력인 듯하다. 우리가 문학에 대해 아주 부분적으로밖에 말하지 못하더라도, 그 모호한 이름으로 우리가 모일 수 있다면, 어떤 특징으로 묶일 수 없는 다채로움을 보여주는 작품들 덕분일 것이다. 이번 호에서는 마종기, 송재학, 신용목, 장승리, 황유원, 임지은, 강혜빈, 김연덕, 장미도, 이실비 시인의 시와 조해진, 함윤이, 정기현 작가의 소설을 만나볼 수 있다. 편혜영 작가의 장편 연재도 이어지고 있다. 또 김나영, 조대한, 최가은, 황사랑, 박민아, 백지은, 송현지, 정홍수 평론가가 지난 계절에 발간된 단행본에 대한 애정 어린 리뷰를 보내주었다.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이 24회를 맞았다. 그 속에 담긴 열정과 질곡을 감히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작품을 마주해 벅차고 떨렸다. 새삼 신인문학상 제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생각해보면 거기에는 형언하기 어려운 역설이 있는 것 같다. 그렇지만 여러 어려움과 제약 속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며 응답을 요구하는, 빛나는 작품들도 있다. 마치 ‘타인이 뜻밖에 그리고 역설적으로─장르의 논리에 대항해’ 내게 말을 거는 것처럼. 심사위원들은 오랜 토의를 거쳐 시 부문에 구윤재의 「모래밭의 나쁜 아이에게」외 4편을, 소설 부문에 윤단의 「작은 알」을 선정했다. 아쉽게도 평론 부문에서는 당선작을 내지 못했다. 새로운 놀라움과 기대를 품게 하는 두 작가에게 많은 응원과 관심을 부탁드린다. 당선작과 당선 소감, 심사 경위는 본권에서 확인할 수 있다. 편집동인 이희우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4년 여름)
문학과사회 편집동인 저 / 15,000원 / 문학과지성사
봄비를 맞다 황동규 저 / 12,000원 / 문학과지성사 “이것 봐라. 죽은 나무가 산 잎을 내미네.
풍성하진 않지만 정갈한 잎을.방금 눈앞에서 잎눈이 잎으로 풀리는 것도 있었어. 그래 맞다. 이 세상에 다 써버린 목숨 같은 건 없다!” 바닥없는 열정과 응시로 삶의 처처에서 발견하는 환한 깨달음 “이 시집의 시 태반이 늙음의 바닥을 짚고 일어나 다시 링 위에 서는 (다시 눕혀진들 어떠리!) 한 인간의 기록이다.” ―「시인의 말」에서 시인 황동규의 새 시집 『봄비를 맞다』(문학과지성 시인선 604, 2024)가 출간되었다. 1958년 미당 서정주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시월」「동백나무」「즐거운 편지」를 차례로 발표하며 등단한 황동규는 묶어낸 시집마다 특유의 감수성과 지성이 함께 숨 쉬는 시의 진경은 물론 ‘거듭남의 미학’으로 스스로의 시적 갱신을 궁구하며 한국 서정시의 새로운 현재를 증거해왔다. 시집 『봄비를 맞다』는 쉼 없는 시적 자아와의 긴장과 대화 속에서 일궈낸 삶의 깨달음을 시로 형상화해온 시력(詩歷) 66년의 그가 미수(米壽)를 두 해 앞두고 펴낸 열여덟번째 시집이다. 전례 없는 팬데믹의 공포가 엄습했던 2020년 가을의 복판에 전작 『오늘 하루만이라도』가 선보였으니 근 4년 만에 다시 새 시집으로 독자들을 찾은 셈이다. 전작에 이어 이번 시집 역시 그간 꾸준히 쓰고 발표한 시 59편과 함께 시 편편의 주요한 처소(處所)이자 생의 후반 이십 년 가까이 시인의 발걸음과 감각을 붙잡아두고 진한 즐거움을 안겨준 공간에 대한 소회를 담은 산문(「사당3동 별곡」) 한 편을 더했다. “집콕의 극치는 역시 혼자 있음. 그 있음에 외로움 하나라도 빠뜨리면 / 혼자 없음.” ─코로나 파편들의 시간, 막다른 골목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다 일상의 이완이자 또 다른 시와의 만남을 예비하는 시간으로 부지런히 여행을 챙겨온 시인에게 4년 남짓 코로나 거리두기가 낳은 ‘집콕의 일상’은 그 끝을 짐작 못 할 긴 겨울처럼 예사롭지 않은 일격이었을 터다. “[혼자] 있음이 [혼자] 없음보다 한참 비좁고 불편하다”(「코로나 파편들」)는 생각이 고여가는 나날, “아침이 가고 저녁이” 와도 “끊임없이 이어지는 무음의 둔주곡”처럼 “소리도 빛도 땜질 자국도 없”이 “건성건성” 살 줄 알았건만(「건성건성」) 웬걸, “걷잡을 수 없이 헝클어”(「흩날리는 눈발」)지기 십상인 노년의 삶은 마스크를 꺼내 쓰고 몇 걸음 집 밖 행보를 그리는 순간부터 주저와 응전을 오가는 치열함과 맞닥뜨린다. 그렇게 나선 눈길 외출에서 새삼 바닥의 맨홀 뚜껑이나 참새는 물론이고, 숱한 망설임을 뒤로하고 집을 나선 시인 자신을(「여드레 만에 집을 나서며」), 또 떨어진 꽃잎 하나가 물길을 절묘하게 막아선 모습을 감탄하는 데서(“계속 버티네! 하긴 버팀만으로도 / 이 코로나 세상에 남아 있을 격 갖춘 게 아니겠나,”) 우리는 황동규 시의 여전한 생기와 활력을 본다. “이런 일 다 집어치우고 싶지만 / 봄비가 속삭이듯 불러내자 / 미처 못 나간 것들이 마저 나가는데 / 어떻게 막겠나?” ─술렁이는 발코니의 시간, 바빠지는 감각들, 다시 고르는 호흡들 영하의 겨울, 아파트 발코니에 사이좋게 세를 든 소철과 알로에, 문주란의 바랜 색과 빛을 우두커니 바라보며 적적해하던 심중도 잠시, 붉게 움튼 제라늄 몇 송이와 고사할 줄로만 알았던 고무나무가 석양을 향해 번쩍 쳐든 잎들의 광경에서 시인은 “지금을 반기며 사는” 삶의 태도(「겨울나기」), 그 아름답고도 절실한 생의 의미를 환기한다. 어디 그뿐인가. 봄가을, 벚꽃과 은행나무가 마치 불길처럼 번져 환하게 메운 덕분에 “발코니에서 홀린 듯 내다”보게 되는(「마음 기차게 당긴 곳」) 오래된 아파트 단지는 시인에게 세상 어느 곳 부럽지 않은, “멍 기차게 때리는 공간”이다. 동시에 “남은 내 삶에도 혹시 불길이 댕긴다면” 분노와 섭섭함으로 “헝클어진 마음을 정신없이 태워” 끝내 “마음 텅” (「불타는 은행나무」) 비우고픈 희망을 키우는 곳이자, 애당초 미움이나 섭섭함을 고이게 두지 않는 편이 낫다는 명쾌한 현실 인식을 외면하지 않는 장소이다. “뵈든 안 뵈든 묵묵히 기는 몸 하나하나가 오색빛 새로 두르게 노래하시게.” ─우연이 겹쳐드는 산책길의 시간, 삶의 경이로움은 계속된다 “허리 부실에 코로나 겹쳐 막다른 골목 다된 이 삶”(「눈물」), “시력 청력 계속 줄고 / 기억력, 감탄, 섬뜩하게 졸았지만”(「삼세번」), 끝끝내 포기할 수 없는 시인의 일상이 있다. 거의 모든 집이 야트막한 담장과 잘 가꾼 꽃밭을 가졌던 사당3동, (이제 자주 오르지는 못해도) 서달산을 낀 채 현충원까지 오고 가는 산책로에서 보고 듣고 만져본 아기자기한 즐거움과 수시로 마주하는 반가움이 그것이다. 시인의 후반생과 시작(詩作) 둘 다의 중요한 동력으로 역할해왔음을 이번 시집에 수록된 숱한 시편이 생생하게 증명한다. “시는 시인 자신의 삶을 형상화하는 것”이며, 시를 완성하는 과정에서 “시적 자아의 윤리적이고 미학적인 면은 사용하되 내가 삶과 부딪히며 생긴 구체적인 면을 살려가는 것이 중요하다”(2016년 호암예술상 수상 기념 초청 강연에서) 말해온 황동규의 시론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된다. “살아 있는 어떤 것 하나라도 대면할 수 있어야 / 마음 붙이지. // […]조그만 만남이라도 산 것과 마주치면 / 생짜 삶이 화끈하게 달려든다.”(「속되게 즐기기」) 이번 시집의 서시로 자리한「오색빛으로」는 시집을 통틀어서 유일한 미발표작이다. 시인이 공들여 벼린 가장 최신의 작품으로 전복 껍데기의 이미지와 운명에 빗댄 시(인)론으로도 읽히는바, 그 시적 사유와 삶의 통찰이 깊고 눈부시기만 하다. “더 낭비할 것이 사라진 순간 / 몸 있던 자리 훤히 트이고 / 뵈지 않던 삶의 속내도 드러나겠지. /[…]/ 뵈든 안 뵈든 묵묵히 기는 몸 하나하나가 / 오색빛 새로 두르게 노래하시게.” “늙음은 온갖 불편의 집합이다. 마지막으로 정리할 게 무엇인가 생각할 때가 되었다. 그러나 지금도 아침에 해가 뜨고 아파트 발코니에선 꽃들이 피고 지고 있다. 보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시, 물빛으로 환한 시간이.” ―「뒤표지 글」에서 세월을 거스를 수 없는 시인의 ‘육체’는 “‘휙휙 돌아가는 계절의 회전 무대나 / 갑작스런 봄비 속을 / 제집처럼 드나들던 때는 벌써 지났”을지 모른다. 그에 반해 시인의 ’정신‘은 지난가을 고사한 줄만 알았던 나무가 빗속에서 연두색 잎을 터뜨리는 순간을 놀라움 섞인 반가움으로 환대한다. 그렇게 “이 세상에 / 다 써버린 목숨 같은 건 없다!”(「봄비를 맞다」)고, “지금을 반기며 사는 것”(「겨울나기」)이야말로 이 한생(生), “미련 없이 우연을 제대로 누리는 삶”(산문 「사당3동 별곡」)으로 거듭나게 할 거라며 우리 마음에 불을 지핀다. 황동규 시 특유의 극서정시(劇抒情詩)는 고목의 속삭임으로도 그 진면모를 드러낸다. “‘이런 일 다 집어치우고 싶지만 / 봄비가 속삭이듯 불러내자 / 미처 못 나간 것들이 마저 나가는데 / 어떻게 막겠나?’” 그렇다. 별것 아닌 사소한 삶의 전경은 살아 숨 쉬는 시(인)의 열정으로, 삶의 경이(驚異)로 이어진다. 맞다. “늙음의 바닥을 짚고 일어나 다시 링 위에 서는 (다시 눕혀진들 어떠리!) 한 인간의 기록이”(「시인의 말」) 숭고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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